2010년 12월 19일 일요일

본색153


'배려'라는 것은 '간격의 유지'다. 운전을 할 경우엔 다름아닌 전후좌우의 차간 거리를 살피는 것이다. 그 것은 스스로 안전하기 위함이요, 동시에 남을 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배려'라는 것은 나를 지키는 일이요 더불어 남을 나와 함께 존재하게 하는 동행의 기술이다.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

본색152


생각함으로써 고통이 존재한다. 고통을 알기 위한 생각들을 한다. 생각으로써 고통의  장애들을 걷어 낸다.  생각을 놓는 생각들.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

본색151


솔직함이란 알면 아는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고, 모르면 모르는대로 알아가는 일들일 것이다. 모험도 때로는 필요한 일이겠지만, 무모함은 오히려 어리석음에 가깝다. 어리석음이 짓고 있는 위업(僞業)들을 살피는 것이 바로 지혜가 아닐까 싶다. 늦지 않은 알아차림이 다름아닌 구원일 것이리라.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

2010년 12월 12일 일요일

본색150


존재는 사실을 말하고, 인식은 자유의 몫이다. 존재가 인식을 결정한다는 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절반의 설명이며, 나머지 절반은 반대로 인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일 것이다. 전자는 주로 욕망의 작용 영역이라면, 후자는 주로 양심의 반작용 영역이리라. 양자를 포함하여 인간의 이중적 본성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싶다. 현상으로서의 삶이란 존재가 인식을 선택하는 구속으로부터 인식이 존재의 자유를 선택하는 그만큼의 보폭으로 서두르는 길 위에 있는 것은 아닐까. 나, 너 그리고 우리라는 것은 흐르는 강물을 사이에 두고 강의 이편과 저편으로 서로 마주보고 갈등하지만, 궁극으로는 하나의 바다에 둘러싸인 고독한 대지의 동행들일 것이다. 따라서 강을 건너기 위해 지금 뗏목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결국엔 그 뗏목조차 필요없는 것이었음을 비로소 알게되는 것이리라.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

연습47


2010 12 10 오후 4시 서울 중구 명동 서울 YWCA 강당에서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서울대공익인권법센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이 고() 조영래 변호사 20주기 추모행사를 열었다고 전한다. ‘전태일평전’의 저자이기도 한 조영래 변호사는 1980년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다 1990 43세의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1947년 대구에서 태어난 조 변호사는 경기고등학교 3학년 때 한일회담반대 시위를 주도하다 정학 처분을 당했고, 서울대 법대에 수석으로 진학한 후에도 삼성재벌밀수규탄, 68부정선거규탄, 3선개헌반대 등 학생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재학 중인 1971 1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지만, 여러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수배와 투옥을 겪은 뒤, '서울의 봄'이라 불리던 1980년 수배가 해제돼 사법연수원에 재입학함으로써 뒤늦은 1982년에야 변호사가 됐다.

 

1971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에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돼 1 6개월간 복역하였으며, 민청학련사건으로 수배돼 유신정권 내내 약 6년 동안 숨어 지내며 도피생활을 하기도 했다. 오늘날까지 살아있는 전태일 정신으로 각인된 <전태일평전 :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은 그가 도피생활 중에 집필한 것이었지만 사후에야 그의 저작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변호사로서 1984년 망원동수재 집단소송, 1986년 여성조기정년제 철폐, 1987년 상봉동 진폐증 사건, '보도지침' 사건 등 끊임없이 인권변호사 활동을 실천해 옴으로써 글자 그대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불꽃처럼 살다 가신 분이다. 1986년 부천서성고문사건으로 독재권력의 야만성을 폭로했고, 수해를 본 서울 망원동 주민 2400가구를 대리해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받아냄으로써 인권과 환경문제 등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치열했던 사람”(장기표 신문명연구원장)이었으며, “집단소송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망원동 수재사건(1984), 여성차별을 시정하는 계기가 된 여성 조기정년제 철폐(1986), 주민에 의한 공해병 소송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상봉동 진폐증 사건(1987) 등 우리 사회 민주화의 핵심고리가 된 사건들을 모두 승소로 이끈”(김선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정의의 사도’로서 1988년 민변의 창립도 그가 주도했다고 전한다.

 

존경할 만한 사람이 없는 오늘의 시대적 좌표로서 명분을 내던지고 몸으로 진실 그대로를 전하면서 인간에 대한 한없는 애정과 겸손에서 비롯된 그의 행적은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하고도 실재적인 방향성을 제시하면서 확증하고 있다. 홍성우 변호사의 추도사에는 “조영래가 가는 곳에는 진실이 있었고, 정의가 있었고, 승리가 있었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그가 살았던 그 ‘야만의 시대’에 그는 분명 가장 정의로운 인간의 삶으로써 우리에게 사람사는 세상, ‘인간의 시대의 의미를 남겨주었던 또 한 분이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듯 하다.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연습

2010년 12월 5일 일요일

연습46

흔히 '실천하는 지성'의 대표로 불려 온 진보적 언론인이자 언론학자이며, 사회운동가였던 리영희(李泳禧) 전 한양대 교수가 2010년 12월 5일 새벽 0시 40분쯤 향년 81세로 별세했다. 1929년 평북 삭주에서 태어나 한국해양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57년부터 합동통신에서 기자로 일했고, 1964년 유엔의 남북한 동시 초청을 기사화하여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으며, 1969년 베트남 전쟁 파병 비판기사를 썼다가 조선일보에서 쫓겨났고, 1971년 ‘군부독재ㆍ학원탄압 반대 64인 지식인 선언’ 참여로 합동통신에서 해직됐다.


1980년 신군부가 ‘광주소요 배후 조종자’ 중 한 명으로 그를 지목, 투옥했을 때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리 전 교수를 ‘메트르 드 팡세’(사상의 은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1987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에서 교환교수로 한국사를 강의하였으며, 이후 한겨레신문의 이사 및 논설위원으로 일했다. 1989년에는 한겨레신문의 방북취재를 기획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다시 구속되기도 했다. 그의 인생은 성찰하는 지식인으로서 반지성에 맞선 치열한 싸움의 거침없는 역정으로 충분히 불릴만하다.


그는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관념’이 아닌 ‘사실’, ‘이론’이 아닌 ‘실천’을 강조했다. 그는 글쓰기를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라고 정의하면서,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 듯’, 진실과 균형의 날개로 저항하면서 성찰하고자 했다. 리 교수는 <전환시대의 논리>(창비사, 1974), 《우상과 이성》(한길사, 1977)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두레, 1994) 등 다수 저서를 남겼고, 지난 2005년 자서전 <<대화>>(한길사, 2005)를 끝으로 지병으로 인하여 모든 집필 활동과 사회적 발언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그의 사상에 대해서는 우파적 입장에서 ‘비체계적인 인본적 사회주의자’로 평하기도 하고, 사민주의적 사회운동가 또는 좌우(左右)를 뛰어넘는 ‘진보지식인의 대부’로 평하기도 한다. 현대사회가 전적으로 결여한 채 출발하였던, ‘비판적 계몽의 선도자’, 또는 상황이 달라지면 지식인은 지난 날보다 더욱 지혜로와져서 이분법적 사고와 비타협적, 독선, 과격을 벗어나는 자기 수정을 해야 함을 강조하는 2005년의 발언 등으로 ‘성찰의 대부’로 칭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자신의 ‘책이 한 권도 팔리지 않아 인세가 0원이 되는 게 소원’이라던 그의 바람을 뒤로 하고, 오늘 ‘가치있는 새 한마리’가 추락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분명 ‘우상의 시대’에 ‘이성의 첨병’이었다. 그러나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기도 하지만, ‘몸부림’이 없다면 앞(?)으로의 진행이 어려울 것이고, ‘분열’은 ‘환멸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성장의 필수과정’이다. 분열의 현재는 고통이지만, 분열한 이후는 ‘한걸음 더 성숙’이다. 그러므로 성숙하기 위해 분열하고, 분열하기 위해 외로운 고통을 선택하는 길, 그것이 ‘합리적인 보수’와 ‘성찰하는 진보’의 진면목이 아니겠는가 싶다. 따라서 지금 눈앞의 현실만을 근거로 당장 성공과 실패를 논하는 것은 오류요, 성급한 결론일 따름이다. 강물은 결코 멈추지 않고 흐른다.


우리는 너무 자주 분열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또한 경쟁력일지도 모른다. 흐르는 강물을 인위적으로 가두지 않고 지속적으로 흐르게 하는 것, 그것이 반도적 기질의 태생적 영향일지도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다. 병리적 도그마에 대한 반기는 그러한 영향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싶다. ‘가두리양식’은 ‘교활한 양육’에 불과하므로 경계해야 할 것은 분열 그 자체라기 보다는 가려진 기만적 술수들일 것이다.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자연과 인간의 본성’을 ‘자유’와 ‘공정’의 이름으로 왜곡하거나 기만해서는 안된다. 민주적인 절차 속에 제도적 참여를 확대해 나가는 것, 그것이 아마도 남아있는 미래일 것이다.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연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