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9일 수요일

본색173

Sany0199

개인의 삶이란 분류되지 않거나, 분류되지 못하는 영역들이 있다. 기타의 영역이며, 미지(未知)의 영역이기도 하고, 무지(無知)의 영역이기도 하다. 그것은 열정적인 사람들이 끊임없이 인생을 논의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지친 사람들이 절대적인 존재나 의견들에 자신을 의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2011년 11월 4일 금요일

본색172


Sany0243

인간의 위대함은 스스로의 규칙을 만드는 능력에 있다. 내적으로는 도덕률이요, 외적으로는 법규범이다. 인간의 사악함은 자신이 만든 규칙도 헌신짝처럼 내팽겨치는데 있다. 내적으로는 일탈이요, 외적으로는 반항이다. 그런 위대함과 사악함으로 한 인간이 구성되어 있다.

2011년 10월 20일 목요일

본색171

Sany0213

존재의 시작과 끝도 모르고, 자의에 의하든, 타의에 의하든, 영혼에 올가미를 쓰고, 씌우는 모든 인식은 불순하다.

2011년 10월 9일 일요일

본색170

Sany0187

두 개의 철길이 침목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어떤 기차도 그 위로 달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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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28일 수요일

본색169

Sany0120

자유의 본질은 모든 형식의 동행, 정의의 본질은 절차 참여의 확대, 진리의 본질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의 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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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21일 수요일

본색168

Sany0058

‎'바보'들은 자신들이 뿌린 씨앗을 거두지 못하고, '위대한 바보'들은 제대로 씨를 뿌리지도 못하지만, 분명한건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누군가는 그 꽃을 피우게 할 것이다. 그런 희망을 남겨둔 이른바 '바보'들의 존재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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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18일 일요일

본색167

Sany0055

'육신의 존재'든, '영혼의 인식'이든 결국엔 소멸한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에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더라도, 후자의 경우는 새로운 종자(種子)로 남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종교에서는 '밀알'을 이야기 하고, 또 어떤 종교에서는 '식(識)'을 이야기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돌고 도는 것이라면 과연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이라고는 어떤 것인지 궁금해진다. 어쩌면 '창조'란 아마도 '인식의 기만'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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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7일 토요일

본색162

Sany0067


나를 정의하는 것은 나의 계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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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161

Sany0017

그런 믿음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들이 어찌 그런 행동을 다 이해할 수 있을까. 존재의 인식 한계를 넘어선 이후는 바로 윤회(부활)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침묵하고 있는 천지(天地)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웃고 있다. 아니 차라리 그냥 내버려 두라고 충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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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27일 일요일

본색160


한때는 내가 없어도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과 세상으로 인해 다소 서운하기도 했었지만, 지나고 보니 내가 없어도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과 세상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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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159


봄은 늘상 속으면서도 또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농부의 설렘과 함께 오고, 가을은 남는 것 없어도 감사할 줄 아는 허수아비춤만으로도 풍요로운 그들의 거룩함과 함께 간다. 그렇게 오고 가는 삶들이 있어 뭇 생명들은 또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가 보다. 삶이란 결국 이익이 남지 않는 장사일 수 밖에 없지만, 늘 발버둥치는 환상 속에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속을 지혜로써 일찍 깨닫는다고 한들 죽지않고 살아있는 마당에 그런 거래를 중단할 수 있을 것인가. 오직 살아서 가능한 바른 행동만이 더 솔직한 깨달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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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158


가려진 잎들이 문득 사라져 버리고, 감춰진 것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밖에 없는 어느 순간에는 누군가의 심판도 결코 피해 갈 수는 없을 것이다. 벌거벗은 채로달리 피할 방도도 없이 그 붉은 속과 마주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부지불식 중이라도 서로가 쉽게 고백하지 못하는 가장 바라던 진실에 가까운 순간이 아닐까 싶다.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 할지라도 이젠 더이상 숨길 수 없으므로 드러날 수 밖에 없는 사실들을 가리고 있는 검은 잎들을 하나씩 지워가는 것, 그것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하는 것이고, 또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하는 것들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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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6일 일요일

본색157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경계하고 서둘러 깨우쳐야 할 일은 바로 자신의 무지일 것이다. 욕망과 집착의 어리석음이 모든 고통의 씨앗임을 아는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 씨앗을 뿌리고 있는 주범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오히려 죄악에 가깝다. 그래서 모든 기도의 시작이 바로 참회일런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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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9일 일요일

본색156


사람이 사상보다 앞선다. 사상이란 사람을 이해하거나 사람의 행동양식의 방향을 결정하는 지표로서의 성격을 갖는 관문에 불과하다. "부자가 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만 부자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는 것이 바로 사상보다 앞서는 '사람의 증명'이 아니겠는가 싶다. 특히나 보수적인 사상적 성향의 사람들로부터의 이와 같은 선언은 사유재산제도의 중요한 한 부분인 '상속의 포기'로서 신선한 혁명에 다름 아니다. 이런 바람(風)들이 사상의 본색을 넘어서 여러 곳에서 다양하게 불어올수록 '사람사는 세상'에서의 골은 더욱 얕게 될 것이다. 망망대해의 어둠에서 뭍으로 이끄는 한줄기 빛이 있다면 모두가 그 곳으로 향하듯이 요즘 보기 드문 '빛과 소금'의 사례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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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155


기술과 제도는 대개 순기능과 역기능을 함께 갖는다. 요즘의 대세인 소셜네트워크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소외를 극복하는 소통의 수단이 될 수 있음과 동시에 새로운 소외의 도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리라. 망의 중립성과 보편적 접근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또 하나의 고통의 씨앗에 불과할 것이다. 일상 생할에 필수적인 요소로서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이미 그것은 공공재다. 권력과 자본의 밑밥을 통제할 수 있고, 많은 대중들이 자유로이 활개를 칠 수 있는 그물을 짜는 일은  과연 누구의 몫일까? 누군가에게 그 일을 맡긴다면 어떤 그물을 짤 사람들에게 위임을 해야할까? 모든 선거에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행사하여야 하는 한표의 또 다른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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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154


육신의 몸이 살아서 깨달음을 말하는 것은 대부분 거짓이다. 육신의 몸이 죽어야만이 아마 절반의 진실일 것이다. 육신의 몸이 살아서 돌아보는 이유는 사후 영혼들의 안식을 위한 준비이며, 그러한 인과의 연을 끊어내어 오래도록 평화롭기 위함일지도 모르겠다. 미리 알아차리지 않으면 영혼도 습관이 있어 그에 따라 움직이려 하므로 내내 조용하질 못할 것이다. 참회와 기도는 그러한 잘못된 습관들을 미리 알아차려 준비하게 하는 기술을 순화하고 체득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죽어서도 죽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자들에게는 죽음조차 가소로운 일이므로 그들에게 두려운 것은 없으리라. 다만, 의지와 상관없이 좌우되는 일들에 대한 다소간의 염려가 있을 뿐, 자신을 제외한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그러니 원망의 대상을 파괴하지 않고 스스로를 정리하는 일을 어찌 가장 위대한 혁명의 하나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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