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28일 일요일

연습12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다른 차원의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어찌보면 인간의 영역을 뛰어 넘는 부분이리라. 그것도 20년도 채 살지 않은 어린 나이로 두려움도, 물러섬도, 머뭇대는 일도 없이 오직 하나의 생각만으로 세상의 벽과 정면으로 맞부닥친 결과 그녀는 피겨요정에서 여왕으로, 여왕에서 황제로 등극하여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신(神)의 경지로 올랐다. 쉽게 무너지지 않을 불가사의한 업적, 당분간은 어느 누구도 가볍게 넘보지 못할 자신만의 제국일 것이다. 짧은 인터뷰기사 중에 지나온 시간동안 기쁨은 잠시였고, 매 순간이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이제는 꿈을 이루어 한 숨 돌릴 수 있는 길고 긴 여정이었다고 했다. 한가지 목표를 향해 일념(一念)으로 달릴 수 있었던 것은 자신과의 엄밀한 약속이행, 욕망을 내려놓고 담대한 승부를 즐길 줄 아는, 진솔하고 빈틈없었던 성실한 삶의 결과물일 것이다. 연기(演技)가 아니라 이미 내면화된 일상의 호흡처럼 가볍고 자연스러운 비상(飛上)이었다. 꿈같고, 환상같고, 물거품같고, 그림자같은 세상의 본질을 이미 내려다 보고 있는 듯한 어떤 깨달음의 경지, 그녀는 이미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다. 김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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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19


아무도 걷지 않은 그 길의 시작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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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18


대신 존재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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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17


빠름도 느림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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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16


존재(存在) 또는 존재에의 기대(期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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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25일 목요일

연습11

하나의 공동체에 있어서 자유의 척도는 얼마나 방해받지 않고 비판할 수 있으며, 얼마나 간섭받지 않고 선택할 수 있는가에 많은 부분 의존할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인간의 정신적인 가치관, 세계관 등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므로 제도적으로 규제를 한다고 해도 스스로 본질적인 한계를 갖는다. 그 핵심적인 영역은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된 일반적 행동의 자유, 즉 자유로운 선택과 접근, 이용의 보장이 필수적인 내용인 것이다. 최근 유럽연합에서는 웹브라우저의 선택권을 제한한 마이크로소프트사에 대해 독점에 따른 폐해의 시정을 요구하여 소비자들에게 인터넷브라우저의 선택권이 주어졌다고 한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오랜 기간 독점이익에 가려 소비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고 불편을 감수한 것이었으며, 우리의 경우는 아직도 그 폐혜 아래에 있다. 그 분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 어떤 기술적, 현실적인 한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관련 업계 종사자들도 오픈 웹상 선택권의 확대를 강조하고 있고, 선진 유럽연합에서도 충분한 논의를 거친 후 내린 결정이라면 우리의 경우도 더 늦지 않게 시정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흔히들 말하는 대로 보안의 문제라면 쉽게 소비자의 선택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며, 오히려 시장에 맡기는 것이 그런 취약성까지 상쇄시킬 기술의 자연스런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규제의 이익을 누리려는 숨은 의도들이 보이지 않는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시장이 늘 합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규제를 해야 할 것들과 자유를 보장해야 할 것들과의 선별 작업의 기준은 무엇보다 다수의 소비자들의 후생을 높이는 방향에서의 접근이 우선되어야 된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인프라를 가지고도 폭넓게 접근하고 이용할 수 있는 활용방안에 머뭇거린다면 경쟁력있는 토대를 썪히는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대내적으로는 새로운 일자리와 소득에 대한 기회의 상실이요, 대외적으로는 다가올 새로운 세상의 주도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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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15


겨울, 어느 햇살은 소금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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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24일 수요일

연습10

사람들의 본성에는 승부에 집착하는 기질들이 숨어 있는 것 같다. 어릴 때는 형제간에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경쟁을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학교에서 남보다 나은 성적을 위해 경쟁을 하고, 사회에서는 더 많은 풍요와 더 나은 지위를 위한 경쟁을 하고, 죽음에 이르러서까지 후세들의 복을 위해 흉 없이 좋은 터에 대한 집착들을 보인다. 물론 모두가 다 그런 삶을 사는 것은 아니지만 본성의 탓이든, 양육의 탓이든 대부분의 삶들이 욕망과 생존으로 직결되어 있는 본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한계 때문일 것이다. 삶이란 단지 경제적인 안위를 넘어 정신적인 가치관이나 신념의 실현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인간의 존재형식이리라.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삶에서의 경쟁의 방식도 총칼을 들고 전장에서 맨몸으로 엉키는 고전적인 방법에서부터 일정한 규칙과 무대를 정해서 즐기는 스포츠와 같은 문화적인 방법, 일터를 수호함으로써 인간다운 최저생활을 보장받기 위한 생계형 투쟁에 이르기까지 현대 사회의 복잡성만큼이나 다양하게 전개된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공정한 룰을 만들고 차별없이 공평하게 그것을 상호 존중하면서 지켜내느냐 하는 것이리라. 많은 사람들이 올림픽이나 월드컵에 열광하는 것도 그나마 가장 공정한(?) 싸움에 해당하는 것들이어서 편견과 사심 없이 쉽게 즐기면서 환호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인류 축제의 장까지 자본의 독점력이 방송권을 독차지하는 등의 행태로써 일반 시민의 보편적 시청권에 장애를 초래하는 탐욕에 대해서는 지체없는 심판의 개입이 필요한 부분일 것이다. 국가를 비롯한 공동체는 합리적인 욕망의 수준을 넘어서는 탐욕에 대해서는 조정자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할 때 그 구성원들로부터 지속적으로 존경받는 권위로서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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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23일 화요일

연습9

자유의 바다에서 정의의 햇살로 진리의 소금을 찾는 방법은 여러가지일 것이다. 사람마다, 제도마다, 분야마다 독자적인 나침반에 의지하여 각자의 길 위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주권국가에서는 흔히 국민의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정의의 기준을 적용한다. 국민의 상식이 정의의 본질에 가장 근접할 것이라는 점에서는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상식의 내용이 말하는 사람마다 다르다면 문제는 간단하지가 않다. 정의(正義)를 정의(定意)하는 최후의 보루인 법원의 상식은 가장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에 근거한다. 그 이유는 직업인으로서의 법관의 객관적 양심에 의지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일련의 사건에서 법원의 판결이 일관되지 않다는 비판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법원을 탓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의 현주소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이해일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같은 사건에서 다른 견해를 나타낸 것이 아니라 당사자와 법원을 달리하는 다른 사건이다. 다른 사건에서 다른 결론은 어찌보면 자연스런 일인데도 왠일인지 정치적 성향과 관련된 사건에는 자신의 입지와 관련하여 지나치게 민감하다. 궁극적으로야 정부의 상식과 국회의 상식과 법원의 상식이 국민의 상식과 일치한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고, 그것이 다르기 때문에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무엇이 오늘을 살아가는 국민의 상식인지 시대정신과 더불어 고민하면서 형성해가야 하는 마당에 섣불리 제 입맛에만 맞는 기준들을 국민의 상식이란 이름으로 빙자하기엔 왠지 어색하다. 견제와 균형이라는 제도의 본질과 직업적 양심에 먼저 충실하는 것이 국민의 이름에 더 어울리는 차선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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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22일 월요일

연습8

살아가는 모습이 때로는 놀이터의 시소타기와 너무 닮아있다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양쪽 끝에 한 사람씩 앉아서 가운데를 중심으로 오르내리기를 반복한다. 아이들의 숫자가 짝수이면 공평하게 나뉘어 나름대로의 균형으로 규칙적인 흐름을 타지만, 그 숫자가 홀수로 짝이 맞지 않으면 한 아이는 흐름을 좌지우지하는 힘을 갖든지 아니면 게임에서 소외되어 누군가 제풀에 지쳐 한 자리가 빌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 아이의 나이가 너무 어려 참을성이 없으면 이내 울음을 터뜨리고, 그 소리를 듣고 나온 부모에 의해 게임은 끝이 난다. 아이들이 없는 시소는 더이상 놀이기구 구실을 하지 못한다. 칠흑같은 어둠이 세계를 뒤덮고 있는 지금 곳곳에서 어른들이 시소를 타고 있다. 좀처럼 빈자리는 생기질 않고 새로운 균형을 향한 탐색은 끝없는 긴장으로 오르내림을 반복한다. 아마존의 눈물과 북극의 눈물들은 넘쳐나지만 위험한 곡예를 멈추게 할 공존과 상생을 향한 연대의 소리들은 점점 희미해진다. 시소타기처럼 반복되는 굴레의 역사, 어쩌면 삶의 실체라는 것은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제자리에서 돌고 도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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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7

세상의 현상들이 모두 때가 있듯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람과 일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과 사람과의 인연의 시작도 그 때가 있으며, 또한 인연의 끝도 분명 그 때가 있다. 그 때라는 것은 마치 아궁이의 군불과 같아서 처음에는 서로가 낯선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살며시 짚에서 옮겨 붙기를 망설이다가, 조금 익숙해지면 희미하게 연기를 피우면서 교묘히 실체를 감추기도 하고, 감당할 수 없는 불꽃이 되어 피어오르기를 기다리기도 하다가, 기대하던대로 막상 불이 잘 붙으면 아무 생각도 없이 온몸으로 붉게 타오르거나, 반쯤의 염려로 머뭇거리기도 하다가, 아예 처음부터 옮겨 붙기에 실패하면 끈질기게 다음을 기약하든지 아니면 뒤돌아보지도 않고 아궁이를 갈아치우기도 하다가, 마침내 힘에 부쳐 조용히 스러지고 말듯이 인연도 예의 그런 주기가 있는 듯하다. 불꺼진 아궁이의 온기 속에서 잘 익은 밤고구마의 흰 속살에 대한 기대처럼 어둠을 지켜가면서 끈질기게 자리를 뜨지 못하게 하는 그런 그리운 인연에 대한 기억 하나가 남아 있는 수 많은 겨울밤을 온전히 버틸 수 있게 하는 버팀목이 될 수도 있을 것인데, 아쉽게도 지금은 그런 인연도 드물고, 그런 인내는 더더욱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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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21일 일요일

연습6

멀리서 볼 때는 길은 하나로 올 곧다. 그러나 가다 보면 의식적이든 혹은 무의식적이든 부지불식중에 스스로가 길을 벗어난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애초에 정해진 길 없는 길 위에서 정해진 자신만의 자리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마는 물길을 거스러는 연어의 본능처럼 그리움은 숨길 수가 없다. 너무 늦지 않게 다시 제 자리에 돌아가기를 바라지만 세상의 모든 것들은 자신과 더불어 너무 빠르게 변해간다. 스스로가 낯설 정도로 가끔은 제 모습을 가늠하기도 몹시 힘들 수도 있다. 그 때는 이미 길을 벗어난 모습대로 자신이 세상에 정의되어 있음을 보게 되기도 한다. 원하는 자리였다면 기쁨은 배가 될 것이지만, 원하지 않았던 자리라면 그 고통의 무게 또한 감당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가능한 한 제 자리를 찾아가는 일, 그것이 남아있는 시간 속에서 내일을 기다리는 이유일 것이다. 길의 방향은 모두 다르더라도 각자의 길은 또한 각각의 의미가 있으므로 살아있는 한 머물 수 없는 여행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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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5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흐르는 강물의 내면에도 양측면이 있다. 좌측으로 구르려는 모래들과 우측으로 치우친 자갈들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 바닥에서는 서로가 뒤엉켜 치열한 물길을 이루면서 시시각각의 생존을 일구어 낸다. 바다에 도달하는 순탄한 인생과 중도에 멈춰 묻혀버리는 안타까운 삶들도 똑같은 하나의 물길이다. 바다에 도달한다고 한들 궁극의 행복과는 별개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갈구하는 보편적인 희망임에는 분명한 듯하다. 그러나 바다의 물길도 다시 하늘로 올라 비가 되어 새로운 계곡을 이루면서 다시 강으로 흐르듯이 흐름은 중단될 수 없는 피의 순환과도 같다. 막혀 멈추지 않고, 넘쳐 터지지 않고, 고갈로 마르지 않도록 적절한 소통의 유지가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그 자유의 바다에 정의의 햇살이 내리쬐면 마지막에 남게 되는 진리의 소금으로 새로운 세상은 다시 새하얀 희망의 꿈을 갖게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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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20일 토요일

연습4

세상의 진실들은 죽음보다 선명하지는 못하다. 그렇더라도 생명의 포기는 신중해야 하며, 도피의 방법이 아닌 자신의 진심을 항변하기 위해 죽음을 수단으로 선택하는 자의 결단을 함부로 얘기할 것도 아니다. 모두가 먹고 살고자 하는 같은 욕망의 굴레 속에서 누군들 삶에 대한 애착이 없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죽임으로써 메세지를 남기는 방법을 선택하는 사람들, 그 가슴 속의 절규를 살아 남은 자들은 다 알 수가 없다. 그조차 사치라며 오히려 알고 싶지도 않으려는 사람들까지도 엄연한 현실 속에 함께 공존한다.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의 차이들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런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이미 사회의 병리현상으로 그 원인과 대책을 찾아야 한다. 시기와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 결국은 그런 고통으로부터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므로 이미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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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3

세상의 학문은 궁극적으로 현상의 삶과 사람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들일 것이다. 지금 현재의 조건 속에서 가장 분석적이고 치밀하게 현실을 설명하고자 하지만 어떤 분야에서든 늘 부족한 허기는 어쩔 수가 없다. 하나로써 전부를 설명하기에는 현실의 사람과 삶은 너무나 복잡한 관계 속에 얽혀있다. 그래서 통섭의 방법론이 보다 더 진실에 다가가기에는 수월할 것이지만, 매 순간의 선택이 개인의 삶들의 방향을 결정하고, 그 순간의 결단들이 이어져 하나의 흐름처럼 긴 인생을 이루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어떤 빛깔의 강물이든, 어떤 모습의 항로이든 바다로 향하는 꿈과 열정은 더하고 덜함이 없이 나름대로 각자의 의미를 스스로 갖고 있는 것이리라. 그래서 또한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도 없다. 어떤 선택이든 다른 사람들의 삶과 생각들이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무시되지 않고 존중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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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2

아이들의 폭력성을 걱정하는 사회, 뭐 그리 유별나게 새삼스러울 것이 있겠으며, 숯이 검정을 나무라는 것 같아 민망하기도 한 일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거울이며, 그들의 사회조차 이미 어른들의 사회를 그대로 모방하고 있음에야 원죄는 분명 아이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어른들일 것이다. 기성 세대들이 먹고 입고 생각하는 대로 그 뿌리를 갖고 줄기를 세워 가지를 치는 삶에서 과연 얼마만큼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을 기대할 수 있을까? 먹이를 향하는 짐승들의 제어없는 질주처럼 욕망을 향한 거침없는 포식성이 현대 사회의 폭력성을 은닉하고 내면화한 탓이기도 하기에 아이들만을 나무라는 것은 어찌보면 비겁한 일이기도 하다. 탐욕의 본성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손치더라도 비난만 하기 보다는 살아있는 어른들의 양육 현장이 적절한 절제와 균형있는 배려의 기준을 세워 모범을 보인다면 자연스레 해결될 수 있는 부분도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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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15일 월요일

연습

사람마다 정의(正義)의 기준은 다르다. 너의 정의(正義)와 나의 정의(正義)가 다르므로 주관적인 정의(正義)를 고집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며, 객관적인 정의(正義)의 기준을 마련하고자 노력하는 일이 합리적이고 현명한 일일 것이다. 따라서 객관적 정의(正義)의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과정에서의 절차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며, 그 절차가 정의(正義)롭지 못하면 아무리 결과가 좋더라도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더불어 일등도 좋겠지만, 어떤 일등인가를 살피는 것이 보다 정의(正義)로운 일일 것이다. 절차의 위법을 관용하는 사회, 겉은 화려할지 모르겠으나 정의(正義)의 기준과는 한참 동떨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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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14일 일요일

본색3


목청껏 소리쳐도 닿지 않는 곳, 거기에는
메아리가 없어서 신이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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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2

업(業)따라 연(緣)이 생기고 연(緣)따라 업(業)이 쌓이는 것을 아는 존재들은
제 몫들에 수긍하고, 그래도 감당하면서 살아내기 위해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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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

의지와 상관없이 늘어지기도 하고 또 때로는 짧아지기도 하지만,
발 끝에 걸린 그림자처럼 변함없이 그대로인 운명같은 인연으로
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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