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31일 토요일

본색122


가족에 대한 사랑은 인간의 본성이다. 가장의 생존투쟁도 대개는 가족의 행복을 위함이다. 그러므로 재가자(在家者)의 행동은 충분한 정당성을 갖는다. 출발은 배우자와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부터 시작해서, 부모, 형제자매까지 넓혀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전부를 감당할 수 없다면 불가피한 우선 순위가 있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가족이 없다고 해서 사랑마저 없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 폭을 차별없이 확대해 갈 수 있는 장점을 가진다. 그러므로 출가자(出家者)는 인연을 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연을 넓혀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분별없는 일체로서 사랑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하물며 사랑하는 가족들을 제쳐두고 자연을 자신의 몸처럼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세상을 가장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가만히 있어도 뜨거운 여름, 그들의 무사귀환을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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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30일 금요일

본색121


날을 세울수록 상처는 깊고 회복은 더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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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29일 목요일

연습44

2010. 07. 28. 재보궐선거는 끝났다. 결과는 여당인 한나라당의 압도적 승리다. 야당인 민주당의 입장에서는 이런 참담한 결과를 예측하긴 어려웠을 것이지만, 이미 예정된 조짐들은 일찌감치 있었다. 후보단일화 과정을 두고 보인 민주당의 행태는 정권심판론을 재탕하면서도 스스로는 전혀 성찰하지 않는 오만이 스스로 자초한 결과로 보는 것이 옳은 판단일 것이다.


정부와 여당의 일방적 독주에 제동을 걸기 위해 지난 6・2지방선거에서 민심은 야당의 손을 들어주어 이를 견제하려고 하였지만, 현 민주당의 정체성으로는 민심의 뿌리로 파고 들기엔 분명한 한계를 보여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야당의 바람을 경시하고 안이한 인물공천과 단일화 과정에서의 일방통행적 세력행사로 현 정권과의 차별화에 실패하여 참패를 초래한 것이리라.

비록 정권심판론을 이야기하지만 오히려 정책의 방향은 놓아두고 그 진정성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현 정부의 오로지 한 목적을 위한 소통없는 저돌적인 집행력과 민주당의 행태는 너무나 닮아있질 않은가. 힘의 분배를 무시하고 절차를 존중하지 않는 일방통행에 실망한 민심은 야당에게서도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게 되자, 이번 재보궐 선거에서는 한여름 밤에 꾼 그들만의 꿈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여실히 확인시켜 준 것이다.


상징적인 지역구인 은평을구에서는 비록 현 정권의 실세인 후보가 지방선거에서의 민심의 심판을 의식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체의 중앙당의 지원을 배제하고 홀로 투쟁한 선거과정에서의 ‘진정성’을 참신하게(?) 평가받은 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얼마만큼의 대가와 실망을 유권자가 또 감당해야 할 것인가는 두고 볼 일이겠지만, 차별성없는 명분보다는 현실적으로 실리적인 대표자를 선택하는 것이 당연한 민심인 것이다.

그 밖의 지역에서도 민주당의 뚜렷하지 못하고 힘이 실린 신뢰를 찾아보기 어려운 정권심판론은 6・2지방선거에서와는 달리 강한 바람을 일으키지 못했으며, 그 틈새로 후보중심의 개별 인물들의 지역 실리주의가 판세를 갈랐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혹자는 ‘진정성’에 대한 평가를 지나치게 낮게 두기도 하지만, ‘진정성’조차도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있는 덕목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진정성’의 방향이라는 것이 오로지 자신과 지역, 특정 단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다수 국민, 국가 전체의 공익을 향할 때에 더욱 빛을 발하는 것임을 아는 일일 것이다. 가치의 방향설정이 뚜렷하지 못할 때 현실 정치의 세계에서는 ‘진정성’이라는 맹목적 가치만으로도 그것이 구체적 실리와 결합할 때에는 엄청난 파괴력을 갖는 변수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의 바위를 뚫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물방울들이 쉼없이 추락해야 하는지, 그리고 또 얼마나 긴 새벽을 뜬 눈으로 지키면서 기다려야 할 것인지 되돌아 보게 한다. 모든 결과는 그 자체로써 원인을 갖는 것이므로 무법(無法)이 아닌 한, 각자의 뜻과 다를지라도 운명처럼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 또한 민주주의일 것이다.

민심은 그렇게 쉬지 않고 흐르는 것이므로 누가 과연 최후의 동행이 될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오직 방심(放心)없이 민심(民心)의 주류(主流)를 살펴 함께 흐를 뿐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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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23일 금요일

본색120


개인의 의사결정은 자유로울수록 정의의 기준에 부합할 것이지만, 제도상의 정책결정은 자유롭지 못할수록 오히려 정의의 기준에 부합한다. 간접민주주의라는 것은 시민의 뜻으로 위임을 하되 위정자의 의사를 적절히 견제하여 균형을 추구하도록 만들어진 제도일 것이다. 따라서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민주적인 제도가 아니다. 최근 공적기관에서 민간인 사찰을 자행한다든지, 권력기관 내부의 암투 등의 원인으로 정적을 사찰하는 행위는  민주주의와는 한참을 멀리하는 '야만의 정치'이다. 아무리 제도를 철저히 갖춘다한들 완벽한 제도는 없을 것이므로 결국 궁극적으로는 '도덕성의 문제'로 귀결될 것이다. 최근 한 여당 의원의 성희롱발언 등을 통해 다시 부각되고는 있지만 새삼스러울 것은 없는 대다수 정치인의 인식이란 여지없이  '정글의 법칙'에서 오직 살아남기 위해 살아남은 자들의 오만이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인 것은 뿌린대로 거두고,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사실을 맑은 하늘처럼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인간의 조건'이다. 한번의 실수는 용납하더라도, 두번의 실수는 엄격히 제도하려는 사회, 바로 '문화국가'의 조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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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20일 화요일

본색119


매일 오르는 등산길에서 가끔씩 우연히 만나는 70대 가량의 노인 한 분이 계신다. 그 분은 만나는 사람마다 그냥 단문의 '안녕하세요'도 아닌, '늘 행복한 하루 되세요'라며 상대에 상관없이 높임말로써 먼저 정중히 인사를 한다. 나는 늘 '아..네..감사합니다.'라는 정도의 뒷북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변화를 몰고 오게 하는 궁극의 힘은 아마도 그 노인처럼 사소하지만 마음을 담은 진정한 전달에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 본다. 혁명이란 것도 거창하게 붉은 깃발아래 폭풍처럼 달려오는 것이 아니라, 그 노인처럼 조용하지만 강력한 메세지로써 꾸준히 다가오는 것이리라. 그 노인을 본받아 만나는 사람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보려 하지만, 10중 8, 9는 여전히 혀끝에서 맴돌고 만다. 아직도 세상을 농익은 채로 바라보는 관조의 힘, 관용이 부족한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도 스스로 벽을 깨지 못하는 불신과 경계의 한계때문일까. 아무리 사소한 언행이더라도 그것의 위대한 힘을 믿고 따르려는 노력으로부터 본질의 혁명은 시작되는 것 같다. 위대한 혁명가는 아마도 먼저 마음을 여는 사람일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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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18일 일요일

본색118


평가의 대상인 존재에 대한 확정없이 그 존재를 평가한다는 것은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교과서에 기술된 역사적 사실들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 뒤의 황당함이란 뒤바뀐 혈육을 알아채지 못하고 자신의 피붙이로 키워 온 부모의 심정에 비견할 수 있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 같다. 낳은 정과 마찬가지로 기른 정이란 상당한 가치를 가진 새로운 관계로서 존재를 설정하긴 하지만, 허구의 역사적 사실은 오류가 확인되는 즉시 존재로서의 가치를 남김없이 상실한다. 평가할 수 없는 것들을 평가한 코메디인 것이다. 아직도 여전한 허구들이 역사란 이름으로 무장한 채 허울 좋게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도 진실규명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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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15일 목요일

본색117


'가족인' 사람과 '가족이 아닌' 사람의 차이는 고난의 순간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행복을 공유하는 것은 비록 남이라도 쉽다. 그러나 고통을 나누는 것은 피붙이라도 쉽지 않다. '가족' 특히 '부부'의 관계가 위대한 것은 법적인 동거, 부양, 협조의 의무를 넘어서 실질적인 운명공동체로서 존재할 때일 것이다. 부족함을 감싸안는 대신 서로에게 바라는 것만 요구하다보면 비록 가진 것이 얼마 없더라도 그나마도 모두 잃고 마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기 쉽다. 한참을 부족해도 이미 내가 가진 것들, 그 소중함들이 가족의 존재만으로도 든든할 때가 있다. 현재 '가족의 굴레' 속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오히려 '가족'이 없는 것이 살아가기에 더 쉬운 일일 지도 모른다고 잘못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완전한 착각이라고 생각한다. 친구가 있어 절실히 친해지면 또한 '가족'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 하나의 가족'을 운운하며 간혹 상업적 기망을 하기도 한다. 모두가 '가족의 힘'을 배경으로 한다. '가족주의'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바탕의 '인간애(人間愛)'를 다시 보고자 함이다. 위대한 사람은 현재 돌보는 가족이 가장 많은 사람이며, 위대한 지도자는 상관없는 남도 가족으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가장 위대한 이름은 바로 당신, 다름아닌 우리들의 '아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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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14일 수요일

본색116


한치 앞도 가늠하기 힘든 현실의 삶 속에서 기도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비록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학자는 연구업적으로써, 예술가는 작품활동으로써, 시인은 시작(詩作)으로써, 노동자는 현장의 노동으로써, 자본가는 끝없는 이익의 추구로써 각자 자신만의 방식의 기도를 한다. 어떤 영역에서든 성과를 내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 기도의 간절함에 있을 것이다.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열심히 목숨을 거는 것이다. 그러나 OECD국가 중에서 자살률 1위라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 댓가로써 일부의 사람들이 누리는 기적같은(?) 한강의 삶으로 충분한 것인가. 배수진을 치고 있는 우리의 기도는 삶과 죽음이라는 공간의 틈 속에서 한가로이 머무를 수 없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절망의 준비다. 그래서 일부 사이비 종교와 종교인들이 그 틈새를 노려 혼란한 판세를 키우고 있는 것이다. 비록 1등이 아니더라도 절망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법, 최소한 자살률 1위의 오명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과연 없는 것일까. 누구나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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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13일 화요일

본색115


'다움'이란 존재에 대한 최상의 평가를 이르는 말일 것이다. 사람은 사람답고, 짐승은 짐승답고, 정치인은 정치인답고, 시민은 시민답고, 종교인은 종교인답고, 신자는 신자답고, 교육자는 교육자답고, 학생은 학생답고, 부모는 부모답고, 자녀는 자녀답고, 어른은 어른답고, 아이는 아이답고, 고양이는 고양이답고, 쥐는 쥐답고, 하늘은 하늘답고, 바람은 바람답고, 강물은 강물다울 때, 세상은 세상답게 흐르는 것이리라. '아름답다'라는 말도 존재에 대한 조화의 균형이 최적의 상태를 이루는 것을 지칭하는 말인 듯 싶다. 마찬가지로 나도 나다울 때 비로소 최상의 나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런데 그 '다움'을 위해서 각자는 과연 어디쯤 서 있어야 하는 것인지 때로는 가늠하기가 쉽질 않다. 고양이가 더 이상 쥐잡기를 포기할 때 더이상 고양이답지 않음과 같은 혼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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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9일 금요일

본색114


보이는 것들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 잎 속에 가려진 호박이 숨어서도 어김없이 제 길을 가듯이 이유있게 느린 자연은 늘 대책없이 시끄러운 인간들보다 위대했다. 종교적 가치관을 떠나서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한들 자연을 건드릴 때마다 하늘에 제를 지내는 자연스런 마음들을 결코 가벼이 생각해서는 안된다. 무모한 도전을 치장하기에는 무고한 희생들이 너무 크다. 강변에서 한 순간 삶의 터를 잃은 생명들, 그 자연이 어느 방죽을 허물어 다시 사람의 생명을 위협할지 알 수 없다. 세상에 이유없는 일들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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