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23일 수요일

본색113


삶이란 그 자체로서 '싸움'이다. 과거와 현재의 갈등이든, 현재와 미래의 대립이든, 자연과 인간의 부조화든, 인간과 인간의 항쟁이든, 문명과 문명의 충돌이든, 집단적 계급투쟁이든, 개인적 아(我)와 비아(非我)와의 투쟁이든, 분명한 것은 예외없이 '싸움'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싸움의 '승패'라는 것은 한정된 조건하에서 제한적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들이라고 생각된다. 어느 시기라든가, 어떤 성과를 전제하고서야 비로소 성립가능한 것이리라. 결국 소멸하지 않는 것은 없으므로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는 것이 본질이겠지만, 그러한 진실을 사람들은 현실의 삶을 핑계로 쉽게 외면하든지, 무시하곤 한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현상들에 급급해하며 승리에 쉽게 취하든가, 패배에 크게 좌절한다. 그러나 운명적으로 피할 수 없는 투쟁일지라도 마냥 짧은 승리에 취하기 위해 부질없는 싸움들을 예비하는 낭비들과 무모한 희생들은 없는지 모르겠다. 무조건 이기기 위한 싸움이기 보다는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가치들이 어처구니 없이 공격당하는 만행만은 제어하는 것이 양심인(良心人)과 문화국가(文化國家)에 어울리는 최소한의 격(格)이 아닐까 싶다. 그 최소한마저도 때로는 버거움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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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17일 목요일

본색112


자유의지로써 누구로부터, 무엇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는 그 누군가에게, 그 무엇에게로 다가가는 것이므로 서운한 일만은 아니다. 오히려 분노해야 하는 것은 오직 자신과 다른 생각과 행동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유의지를 박탈 당하거나 억압 당하고 왜곡 당하는 일일 것이다. 다양한 사상과 생활양식의 존재, 그리고 제한받지 않는 선택가능성과 소통의 유지, 그것이 사상의 자유시장에서의 경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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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16일 수요일

본색111


공정한 심판하에서 오직 실력과 노력의 차이로만 명백하게 승패가 결정되어야 할 스포츠의 역사도 살펴보면 어김없이 '희극 속의 비극적 암투'로서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대변하고 있다. 독점자본의 횡포와 과점계급의 전횡은 예나 지금이나 월드컵과 올림픽이 단순한 축제, 그 이상의 폭압적 의미를 함께 내포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중독된 환자처럼 무뎌진채 '붉은 악마'들의 함성에 파묻혀 있어도 자신의 국적은 비록 '조선'이 아닌 '한국'이지만 남한도, 북한도, 일본도 아닌 재일교포3세라는 디아스포라, 한 선수의 복잡한 눈물이 어김없이 그늘진 축제 속의 현주소를 다시금 깨닫게 한다. 다시 하나될 날은 그 언제쯤 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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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15일 화요일

본색110


돌고 돌고 또 돌아서 제 자리로 돌아온 것들의 역사는 간단치 않다. 예정된 날보다 3년이나 늦게 귀환하면서 하야부사(송골매라는 뜻의 일본의 우주탐사선)가 떨어뜨린 캡슐 속에는 아마도 지구와 화성 사이의 어느 소행성(이토카와)의 생성과 성장의 비밀이라는 선물을 담고 있을 것이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비록 모든 장비는 거의 파손되고 에너지는 소진되었지만,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귀환을 소망한 의지의 기도 덕분일 것이리라. 아직 출발도 제대로 하지 못한 우리의 나로호, 무엇보다 가야할 길은 더 멀겠지만, 그보다 먼저 비록 만신창이로 길을 잃고 미아로 허공을 방황하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제자리로 불러들일 그런 인내와 관용의 준비가 되어있는지 그것부터 점검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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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109


물은 길을 내어주는 땅의 속으로 녹아들면서 바다로 간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물길 하나 내어주지 못하는 아량으로 바다는 어림도 없다. 상류의 조급함과 하류의 느슨함이 모두 바다로 가는 하나의 물길이다. 빠름과 느림이란 것도 같은 흐름 속에서는 본질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일종의 착시현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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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13일 일요일

본색108


시장으로 넘어간 것은 권력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마저 이미 팔아 넘긴 듯 하다. 교묘한 '상술'이 사람사는 세상의 원칙과 상식마저 '기획상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가치와 신념을 위해 운명처럼 목숨을 건 사람에 대한 '추모의 정'마저, 굶주린 하이에나를 닮은 '장사'꾼들에게는 단순히 입도선매, 창고방출의 대상에 불과한 듯. 내일은 또 어떤 급한 입들이 죽은 영혼을 팔기 위해 헤드라인부터 '장사'진을 치고 있을지. 싸움의 대상은 순서를 잃고 혼돈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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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10일 목요일

본색107


애플이 아이폰과 아이패드에서 구글의 애드몹(AdMob)과 다른 광고 솔루션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새로운 개발자 조건'(new developer terms)를 내검으로써 확실한 '제국의 통제'에 나섰다고 한다. 구글의 광고 사업조직인 애드몹의 설립자, 오마르 하무이(Omar Hamoui)는 '개방과 경쟁'을 내세우면서 개발자와 소비자의 피해를 우려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모르겠지만, 현재로선 확실한 '디지털제국주의'시대가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인 듯 하다. 혁신과 공유라는 이름의 또 다른 독재의 기술을 은폐하기 위한 교묘한 자유(?)의 자화상들이다. 피를 흘리지 않고도 세상을 지배할 수 있게 된 지금, 사람들의 자유는 어디를 흐르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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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9일 수요일

본색106


통제가 혁신을 낳는다고 보이는 것은 통제 밖의 자유에 대한 독점적 지배라는 유인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통제를 통하여 혁신이란 이름으로 독점이익의 유혹에 쉽게 빠지면서 그것을 향유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이 합리적인 수준의 이익을 넘는 악의 씨앗이 되지 않도록 감시하는 일은 통제 밖의 자유세력들의 몫이다. 개인적 자유의지들의 최종적인 방호벽은 그들을 선택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다. 단, 전제는 그들을 선택의 대상에서 제외하더라도 나머지 삶의 영역에서 큰 지장이 없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애초부터 무게중심이 지나치게 한쪽으로 쏠리는 것을 사전에 미리 경계할 필요가 있다. 모든 생활영역에서 견제와 균형을 위한 대안세력의 존재가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넓혀주고, 그 선택의 폭도 확대해 나갈 때, 각 선택의 객체들은 혁신, 또는 다른 어떤 이름으로 선택되기 위한 경쟁들을 한다. 통제는 혁신을 위한 빠르고 손쉬운, 그러나 위험한 한 방법일 뿐, 그것을 결코 최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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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105


'진보의 성공'은 어느 순간으로 가능할지는 몰라도, 그것이 지속가능한 가치로서 자리하기는 어렵다. '진보의 가치'란 일정하게 정해진 규격화된 몫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늘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어떤 정의(正義 혹은 定意)를 요구하는 것'이다. 달라진 상황에 따른 예고된 분열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진보라고들 자신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혹시 진보도 보수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때로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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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6일 일요일

본색104



길의 시작과 끝은 알 수 없지만, 삶의 시작과 끝은 아마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부터 감당할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까지'일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종말에서의 인식은 적어도 둘 중 하나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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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103


내가 병(病)을 인식하면 병(病)도 나를 기억하고, 내가 병(病)을 잊으면 병(病)도 나를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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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5일 토요일

본색102


내가 흐르는 법, 느낌으로 기억했다가 메모로써 기록하고, 생각으로 다시 정리했다가 그 생각마저 던져버리는 것, 생각으로써 생각을 내려 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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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43

2010. 6 .2. 선거는 끝났다. 총체적으로 본다면 야당의 승리로 결론지어도 무방할 듯 하다. 북풍에 맞선 노풍을 전면에 부각시키며 전 정권의 심판론을 내세웠던 여당의 입장에서는 결과적으로 역풍을 맞은 셈이다. 반면 전쟁과 평화의 구도로 반 MB의 연대를 형성한 야당은 결과적으로 일정부분 성공적인 전술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막강한 보수언론을 등에 업은 초반의 형식적인 여론조사의 불리한 결과를 안고서도 최종적인 전국적인 득표 상황을 보면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던 다수 국민들의 준엄한 심판이라고 보아도 무방 할 듯 하다. 주요 쟁점인 4대강과 세종시, 그리고 무상급식 등의 문제에 있어 대다수 국민들의 선택이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났음에도 정부의 태도는 현재로선 아랑곳없이 밀어붙일 태세다. 그러나 상황이 예전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지방자치단체장 들의 협조 없이는 4대강사업의 원활한 집행이 차질을 빚을 뿐만 아니라, 세종시 원안고수라는 지역주민의 입장을 선거의 결과로서 확인한 지금 중앙정부가 이에 상반되는 행보를 보일 때는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제도적인 절차 내에서 소통으로 원만하게 해결되지 않는다면 정부와 여당은 스스로 운신의 폭을 좁혀 결국 더욱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될 확률이 높다. 만약 전국적인 불복종운동으로 비화되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이제는 대통령의 임기도 절반을 넘어 후반기로 접어들었다. 여당 내에서도 예전과는 달리 반복될 재보궐선거와 다가올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발빠른 득표계산을 할 것이다. 여당 내에서조차 다른 목소리들이 힘을 싣게 된다면 정권의 레임덕은 예상보다 훨씬 빨리 도래할 수도 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을 현명하게 극복하는 방법은 겸허하게 선거의 결과를 정책에 반영하는 길일 것이다. 부인하고 싶겠지만 어떤 형식의 선거라도 분명 정부와 정책의 심판기능을 당연히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지방선거와 교육선거였지만 위정자의 입장에서는 국민이 중앙정부를 함께 심판했다고 보아야하는 것이 정의의 기준에 맞다. 야당의 입장에서도 이번 선거의 결과를 결코 자만해서는 안된다. 반 MB의 연대로 형식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여전히 절반의 승리다. 서울과 경기에서 기초자치단체장의 결과와 광역자치단체장의 결과가 다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단지 후보자 개인의 실패로 치부하기 보다는 여전히 다양한 선거권자 개인의 입장이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본질적인 인간으로서 극복하기 어려운 벽이 남아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이 탐욕으로 흐르지 않도록 제어하고, 공정한 심판자로서 자리매김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사안에 따라 인물연대와 정책연대로 힘을 합하되, 평상시에는 각 당이 그 존재를 유지하면서 더욱 선명성 경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본다. 진보의 가치는 끊임없이 분열하되, 대의에 맞서서는 또한 망설임없이 연대함으로써 유지되는 것이다. 연대하지 않는 진보는 선명성 경쟁에서는 성공하겠지만, 필요한 물길을 바꾸지는 못한다. 하지만 비록 실패하더라도 그들이 진정한 진보의 씨앗을 뿌리고 있음을 부정해서도 안된다. 물길을 바꾸더라도 그 물길에 안주하는 것은 또 다른 보수이지 진보의 길은 아닌 까닭이다. 그러므로 야당의 입장에서도 ‘통합을 위한 통합’논의보다는 ‘무엇을 위한 통합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것이다. ‘정치철새’는 신념도 없이 이해에 따라 옮겨 다니는 것을 의미하지만, 정작 ‘철새’는 길 아닌 길을 가지 않는다. 철새로 하여금 길 아닌 길을 가게 만드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다른 변수들이다. 불가항력이란 당사자를 비난하기 어려운 요소들이 작용한다는 말이다. 정치인들이 철새를 운운하는 것은 어찌보면 철새를 모욕하는 일이다. 늘 그렇듯이 이번 선거결과도 각자의 입장에서 많은 아쉬움이 남긴 하겠지만 딱 그만큼의 우리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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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3일 목요일

본색101


집단의 정체성이 개인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이 집단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구조이어야 한다. 개인이 집단을 위해서 무엇을 하도록 강요 당하는 것은 이미 구시대의 유믈이며, 오히려 집단이 그 구성원인 개인들의 다수 행복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먼저 고민해야 하는 시대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그 소속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도록 선택의 폭을 넓혀 주어야 하며, 집단간 서로 다른 복수의 선택도 충분히 가능하도록 열린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개인에 대한 통제가 훨씬 수월해진 만큼 개인들의 창조적 다양성의 존중만이 갇힌 울타리를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소모적인 당쟁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여 그 속에 갇히기 보다는 서로 다른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논쟁의 긍정적 역량에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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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100


경계가 있다면 그것은 대부분 인위적인 계급의 값들이다. 그 값들이 실질적인 가치를 반영하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계급의 입맛에 따라 좌우된다. 가치의 실질적 반영을 위해 계급의 벽을 완화하여 진입의 장벽을 낮추고, 그 독점적 혀끝을 공정하게 다스리는 것은 국가의 의무다. 그런 백기사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국가는 국민에게 또 하나의 괴물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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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99


분열은 분명 생명현상이긴 하지만, 항원의 존재 앞에서 항체를 형성하지 않는다면 개인 뿐만 아니라 집단까지도 위태롭게 한다. 반복적인 침입으로 일단의 면역이 생기더라도 안정적인 세력으로 자리하기까지는 끊임없는 연대가 필요한 이유다. 연대의 목적이 끝나 다시 분열하는 것이 원칙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면 주저없이 또 길을 떠나는 것이 늘 새로운 생명들의 생존방식이 아닐까 싶다. 머무름이란 변화를 추구하는 세력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사치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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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2일 수요일

본색98


절대적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하고, 상대적 권력은 상대적으로 부패하듯이 영원한 권력이란 없다. 따라서 제도권력은 반드시 실패하는 것이 그 운명이기도 하다. 개인적 실패든, 집단적 실패든 불문하고 선거와 투표는 그런 실패를 단편적으로 보정해 나가는 장치이다. 비록 예정된 실패를 맞더라도 잠시 당황은 할지언정 좌절은 할 필요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진보의 미래는 예정된 실패를 다시 희망으로 돌리는 주변의 미약하지만 끊김없는 힘이다. 진보의 힘은 언제나 제도 밖에서 외롭게 존재하는 것이 또한 그 운명이기도 하다. 그러나 진보가 제도권력이 되는 날, 진보는 더이상 진보가 되기는 어려우므로 즉시 내던져야 진보의 가치가 다시 사는 길이다. 세포분열처럼 분열하는 것이 바로 진보의 본질을 설명하는 생명인 까닭이고, 순환처럼 흐르고 있는 매 순간만이 진실의 날들인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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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1일 화요일

본색97


꽃을 피워내기 위해서는 뿌리를 지켜야 한다. 무엇이 뿌리를 지켜내는 방법일 것인가는 저마다 생각하는 바가 다를 것이지만, 헷갈릴 때는 상식적인 선에서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도리어 원칙을 지키는 길이 아닐까 싶다. 변화의 방법은 너무나 다양하다는 것, 그것이 희망이기도 하고, 동시에 절망이기도 하다. 오늘 어떤 선택이 내일 나를 더 뚜렷하게 할 것인가. 그것이 최소한 나의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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