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19일 일요일

본색153


'배려'라는 것은 '간격의 유지'다. 운전을 할 경우엔 다름아닌 전후좌우의 차간 거리를 살피는 것이다. 그 것은 스스로 안전하기 위함이요, 동시에 남을 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배려'라는 것은 나를 지키는 일이요 더불어 남을 나와 함께 존재하게 하는 동행의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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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152


생각함으로써 고통이 존재한다. 고통을 알기 위한 생각들을 한다. 생각으로써 고통의  장애들을 걷어 낸다.  생각을 놓는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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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151


솔직함이란 알면 아는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고, 모르면 모르는대로 알아가는 일들일 것이다. 모험도 때로는 필요한 일이겠지만, 무모함은 오히려 어리석음에 가깝다. 어리석음이 짓고 있는 위업(僞業)들을 살피는 것이 바로 지혜가 아닐까 싶다. 늦지 않은 알아차림이 다름아닌 구원일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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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12일 일요일

본색150


존재는 사실을 말하고, 인식은 자유의 몫이다. 존재가 인식을 결정한다는 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절반의 설명이며, 나머지 절반은 반대로 인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일 것이다. 전자는 주로 욕망의 작용 영역이라면, 후자는 주로 양심의 반작용 영역이리라. 양자를 포함하여 인간의 이중적 본성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싶다. 현상으로서의 삶이란 존재가 인식을 선택하는 구속으로부터 인식이 존재의 자유를 선택하는 그만큼의 보폭으로 서두르는 길 위에 있는 것은 아닐까. 나, 너 그리고 우리라는 것은 흐르는 강물을 사이에 두고 강의 이편과 저편으로 서로 마주보고 갈등하지만, 궁극으로는 하나의 바다에 둘러싸인 고독한 대지의 동행들일 것이다. 따라서 강을 건너기 위해 지금 뗏목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결국엔 그 뗏목조차 필요없는 것이었음을 비로소 알게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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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47


2010 12 10 오후 4시 서울 중구 명동 서울 YWCA 강당에서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서울대공익인권법센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이 고() 조영래 변호사 20주기 추모행사를 열었다고 전한다. ‘전태일평전’의 저자이기도 한 조영래 변호사는 1980년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다 1990 43세의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1947년 대구에서 태어난 조 변호사는 경기고등학교 3학년 때 한일회담반대 시위를 주도하다 정학 처분을 당했고, 서울대 법대에 수석으로 진학한 후에도 삼성재벌밀수규탄, 68부정선거규탄, 3선개헌반대 등 학생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재학 중인 1971 1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지만, 여러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수배와 투옥을 겪은 뒤, '서울의 봄'이라 불리던 1980년 수배가 해제돼 사법연수원에 재입학함으로써 뒤늦은 1982년에야 변호사가 됐다.

 

1971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에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돼 1 6개월간 복역하였으며, 민청학련사건으로 수배돼 유신정권 내내 약 6년 동안 숨어 지내며 도피생활을 하기도 했다. 오늘날까지 살아있는 전태일 정신으로 각인된 <전태일평전 :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은 그가 도피생활 중에 집필한 것이었지만 사후에야 그의 저작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변호사로서 1984년 망원동수재 집단소송, 1986년 여성조기정년제 철폐, 1987년 상봉동 진폐증 사건, '보도지침' 사건 등 끊임없이 인권변호사 활동을 실천해 옴으로써 글자 그대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불꽃처럼 살다 가신 분이다. 1986년 부천서성고문사건으로 독재권력의 야만성을 폭로했고, 수해를 본 서울 망원동 주민 2400가구를 대리해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받아냄으로써 인권과 환경문제 등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치열했던 사람”(장기표 신문명연구원장)이었으며, “집단소송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망원동 수재사건(1984), 여성차별을 시정하는 계기가 된 여성 조기정년제 철폐(1986), 주민에 의한 공해병 소송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상봉동 진폐증 사건(1987) 등 우리 사회 민주화의 핵심고리가 된 사건들을 모두 승소로 이끈”(김선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정의의 사도’로서 1988년 민변의 창립도 그가 주도했다고 전한다.

 

존경할 만한 사람이 없는 오늘의 시대적 좌표로서 명분을 내던지고 몸으로 진실 그대로를 전하면서 인간에 대한 한없는 애정과 겸손에서 비롯된 그의 행적은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하고도 실재적인 방향성을 제시하면서 확증하고 있다. 홍성우 변호사의 추도사에는 “조영래가 가는 곳에는 진실이 있었고, 정의가 있었고, 승리가 있었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그가 살았던 그 ‘야만의 시대’에 그는 분명 가장 정의로운 인간의 삶으로써 우리에게 사람사는 세상, ‘인간의 시대의 의미를 남겨주었던 또 한 분이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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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5일 일요일

연습46

흔히 '실천하는 지성'의 대표로 불려 온 진보적 언론인이자 언론학자이며, 사회운동가였던 리영희(李泳禧) 전 한양대 교수가 2010년 12월 5일 새벽 0시 40분쯤 향년 81세로 별세했다. 1929년 평북 삭주에서 태어나 한국해양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57년부터 합동통신에서 기자로 일했고, 1964년 유엔의 남북한 동시 초청을 기사화하여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으며, 1969년 베트남 전쟁 파병 비판기사를 썼다가 조선일보에서 쫓겨났고, 1971년 ‘군부독재ㆍ학원탄압 반대 64인 지식인 선언’ 참여로 합동통신에서 해직됐다.


1980년 신군부가 ‘광주소요 배후 조종자’ 중 한 명으로 그를 지목, 투옥했을 때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리 전 교수를 ‘메트르 드 팡세’(사상의 은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1987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에서 교환교수로 한국사를 강의하였으며, 이후 한겨레신문의 이사 및 논설위원으로 일했다. 1989년에는 한겨레신문의 방북취재를 기획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다시 구속되기도 했다. 그의 인생은 성찰하는 지식인으로서 반지성에 맞선 치열한 싸움의 거침없는 역정으로 충분히 불릴만하다.


그는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관념’이 아닌 ‘사실’, ‘이론’이 아닌 ‘실천’을 강조했다. 그는 글쓰기를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라고 정의하면서,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 듯’, 진실과 균형의 날개로 저항하면서 성찰하고자 했다. 리 교수는 <전환시대의 논리>(창비사, 1974), 《우상과 이성》(한길사, 1977)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두레, 1994) 등 다수 저서를 남겼고, 지난 2005년 자서전 <<대화>>(한길사, 2005)를 끝으로 지병으로 인하여 모든 집필 활동과 사회적 발언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그의 사상에 대해서는 우파적 입장에서 ‘비체계적인 인본적 사회주의자’로 평하기도 하고, 사민주의적 사회운동가 또는 좌우(左右)를 뛰어넘는 ‘진보지식인의 대부’로 평하기도 한다. 현대사회가 전적으로 결여한 채 출발하였던, ‘비판적 계몽의 선도자’, 또는 상황이 달라지면 지식인은 지난 날보다 더욱 지혜로와져서 이분법적 사고와 비타협적, 독선, 과격을 벗어나는 자기 수정을 해야 함을 강조하는 2005년의 발언 등으로 ‘성찰의 대부’로 칭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자신의 ‘책이 한 권도 팔리지 않아 인세가 0원이 되는 게 소원’이라던 그의 바람을 뒤로 하고, 오늘 ‘가치있는 새 한마리’가 추락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분명 ‘우상의 시대’에 ‘이성의 첨병’이었다. 그러나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기도 하지만, ‘몸부림’이 없다면 앞(?)으로의 진행이 어려울 것이고, ‘분열’은 ‘환멸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성장의 필수과정’이다. 분열의 현재는 고통이지만, 분열한 이후는 ‘한걸음 더 성숙’이다. 그러므로 성숙하기 위해 분열하고, 분열하기 위해 외로운 고통을 선택하는 길, 그것이 ‘합리적인 보수’와 ‘성찰하는 진보’의 진면목이 아니겠는가 싶다. 따라서 지금 눈앞의 현실만을 근거로 당장 성공과 실패를 논하는 것은 오류요, 성급한 결론일 따름이다. 강물은 결코 멈추지 않고 흐른다.


우리는 너무 자주 분열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또한 경쟁력일지도 모른다. 흐르는 강물을 인위적으로 가두지 않고 지속적으로 흐르게 하는 것, 그것이 반도적 기질의 태생적 영향일지도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다. 병리적 도그마에 대한 반기는 그러한 영향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싶다. ‘가두리양식’은 ‘교활한 양육’에 불과하므로 경계해야 할 것은 분열 그 자체라기 보다는 가려진 기만적 술수들일 것이다.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자연과 인간의 본성’을 ‘자유’와 ‘공정’의 이름으로 왜곡하거나 기만해서는 안된다. 민주적인 절차 속에 제도적 참여를 확대해 나가는 것, 그것이 아마도 남아있는 미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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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28일 일요일

본색149


불과 언어와 도구의 사용으로 '만물의 영장[靈長]'이 된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는 인간이 만들어낸 생활속의 도구들을 통해서도 알아차릴 수 있는 면이 있다. 간단한 일례로 자동차의 구조를 보더라도 자동차는 편리한 이동수단에 대한 인간 욕망의 산물이지만, 그 내면에는 속도를 내는 액셀과 속도를 줄이는 브레이크를 동시에 장착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탐욕으로 질주하더라도 일정한 욕망의 수준을 넘어서게 되면 그 탐욕을 제어하고자 하는 기제가 인간의 본성에 처음부터 내재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것이 선이든 악이든 상관없이 태생적으로 '이기적인 동시에 이타적인 심성의 존재'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기적이고, 이타적이란 용어도 '존재의 실상'과는 다른 '인식의 관점'에 불과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본성이란 '자유'를 주장하면서도 '책임'을 의식하게 하고, '자율'을 강조하면서도 '연대'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하며, '경제학'과 더불어 '윤리학'을 가르키는 '이중적 심성'이라고나 할까. 따라서 어느 하나가 주(主)가 될 수는 있겠지만, 어느 한가지 특성만으로는 결코 '만물의 영장'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제도라는 것들도 '무한질주와 잠깐멈춤 사이의 어느 정거장에서의 정돈 중인 일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의 '교통체계'라는 제도들이 현재의 기술로 가장 합리적인(?) 소통을 위해 준비되고 있는 것 또한 마찬가지의 예일 것이다. 운전자의 성향과 기술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들도 많을 것이므로 누가 운전대를 잡는가 또는 누구에게 운전을 맡기는가에 따라 '운행자로서의 책임'과 '피해자로서의 구제'의 폭도 달라질 것이다. 좀 더 기술이 발달하여 자동차가 스스로 알아서 운행을 할 수 있다면, 그래서 잘못된 길을 들어섰을 때 마치 아무일 없는 듯 백지상태로 포맷도 하여 다시 출발할 수 있다면 지금과는 또 다른 역할의 '진화(?)된 심성'의 세상일 것이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결국 '지금 현재'라는 같은 차를 타고 있으며, 차는 스스로가 낸 길을 따라 가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얼마나 자주 '일단은 저지르면서도 되돌아 볼 줄 아는 작용과 반작용의 심리적 기제'로 지속가능한 공존을 위해 노력하는가에 따라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의 여부도 달려있다고 본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 역시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쓸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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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27일 토요일

연습45

싸움에도 예외없이 기술과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땅에서는 휴전 이후 한시도 긴장을 없는 상호 대치상태에서 지금까지 서로 많은 비용과 희생을 감내하면서 싸움에 대한 준비를 해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술도 발전하여 싸움의 형태도 다양하게 변모하고 있는 실정이며, 북한의 핵개발의 의욕은 여전한 듯하다. 배후가 의심되는 해커들에 의한 사이버공격이라든지, 민간인 관광객에 대한 공격, 그리고 검증이 필요하긴 하지만, ‘천안함사건 연평교전에서와 같은 국지전적 도발 등의 양상이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이 북한의 통일전선전술의 일환으로써 의도된 공격인가의 여부는 놓아두고라도, 상황이 발생한 제반 환경들을 되짚어 보면 정부의 미숙한 대응전략이 오히려 불필요한 갈등과 피해를 증폭시켜온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병역의무는 변함없이 신성한 국민의 의무 하나로서 여전히 땅의 정상적인 젊은 주역들은 국토방위의 훈련에 여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위정자와 일부 고위 공직자들은 대부분 병역의무조차 이행하지 않은 자들로 가득 있어 위기상황에 대한 제대로 인식과 대처능력이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휴전상태인 한반도에는 이미 전쟁에 대비한 '교전규칙'(1953년 유엔군사령부가 제정한 것으로 정전협정에 따라 우발적인 무력충돌이 확전되지 않도록 작전 상황을 관리하는 큰 틀의 지침서)이라는 것도 따로 마련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수행할 능력이 있는지는 이번 연평교전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야 말았다. 그에 따르면 현재 '교전규칙'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북한 영토 내 해안포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우리 합참의장과 유엔군사령관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적 사격시 대등한 무기체계로 2배로 대응해야하는 제한도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번 연평교전에서는 적의 도발 수위와 비슷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비례성 원칙과 적의 도발을 억제할 만큼의 대응이 돼야 한다는 충분성 원칙이 모두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인 것 같다. 헌법상 침략전쟁은 부인되며, 전작권을 갖고 있지 못한 현실적인 한계도 또한 그러한 제한들의 한 근거들일 것이지만,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그러한 다양한 도발가능성에 대비해 사전에 얼마나 준비된 모습으로 있었던가일 것이다. 교전수칙의 보다 근본적인 존재의의도 실제 발생할 교전상황에서의 대응수칙이라기 보다는 그러한 공개적인 표시로 말미암아 도발상황이 애초에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는 사전예방목적이 우선일 것이라는 판단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연평교전'을 계기로 확전방지를 강조한 기존의  교전규칙을 개정해서 사후약방문격으로 민간 공격과 군 공격을 구분해 대응 수준을 차별화하여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려한다고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교전규칙 개정은 유엔군사령관의 허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어서 교전규칙의 직접적인 개정은 어렵고, 그 하위개념인 합참의 작전예규나 작전지침을 수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현실적 해석도 있다.  의도된 직접적인 타격과 민간인에 대한 공격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하고,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일어났지만, 그나마 그러한 교전규칙때문에 확전양상으로 전개되지 않은 것이라면 불행 중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교전규칙을 강화하려는 것은 사전예방보다는 사후보복에 중점을 두는 것이어서 평화적 관점에서 바람직한 방향인지는 개인적으로 여전히 의문이다.

 

이번 사건의 핵심은 사전에 북측의 경고메세지를 접하고도 안일한 대응으로 접경지역에서의 무리한 훈련의 강행과 상황발생 즉시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키운 이 정부의 안보불감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천안함사건'과 마찬가지로 초기 대응은 여지없이 또 늦었으며, 대응할 무기의 일부는 '정비중'이거나 '기능장애'상태 었다고 한다. 천안함 사건 당시에는 음향탐지장치가 제기능을 하지 못했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대포병레이더가 노후화로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처음에는 북한의 포가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몰랐다고 하니 참담한 심정이다.  고군분투한 것은 자신의 철모에 불이 붙은 줄도 모르고 전장을 사수하고, 장렬히 산화한 전장의 장병들 뿐이었다.

 

위기시 지휘계통의 혼돈으로 기존 교전수칙상의 대응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현실을 지켜 보면, 그동안의 호언장담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믿음에 대한 보장도 할 수 없으며 이해관계가 다른 누군가의 그늘에만 의지해서 무책임하게 국민의 목숨을 걸고 소리만 높인 허세가 아니었던가 싶다. 싸움에 있어 최선의 기술과 준비란 '싸우지 않고 이기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담보로 언제까지 '위험한 도박'을 일삼을 것인지 답답할 따름이다. 이처럼 무책임한 상태에서 만약 그 폭탄이 우발적으로라도 서울로 향한다면(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이처럼 편안한 한탄조차 가능하겠는가?

 

분명한 것은 오늘날과 같은 복잡한 국제적 역학관계와 첨단기술, 잠복된 핵무기의 위험을 앞에 두고서 '전쟁' 운운하면서 위기를 키운다면 남과 북, 어느 누구도 결코 승자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강경일변도의 대북정책과 햇볕정책의 성과를 이제는 이 정부의 모토인 '실용의 관점'에서도 차분히 비교분석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무엇이 서로를 더 이롭게 하며 진정한 승리의 길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실용의 핵심적 관점이 투입 대비 ‘산출’의 효율성이라면 그동안 우리가 잃은 것은 무엇이며, 우리가 얻은 것은 또 무엇인가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갖추어야 할 싸움의 기술과 준비는 가능한 싸우지 않기 위한 것들이어야 할 것이며, 싸움이 있더라도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것들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마도 그것만이 모두가 승리하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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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21일 일요일

본색148


가난은 불편할 뿐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준은 '성인의 경지'다. '범부의 입장'에서 가난은 불편하고도 부끄러운 일(?)이다. 여기서 부끄러움이라는 말은 인격을 갖춘 개인이 현재의 가난에 대한 자신의 책임부분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는 말이다. 그렇더라도 사회가 부담해야 할 몫들에 대해서 면죄부를 준다거나 관용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가난한 자는 부끄러움을 알지만, 부자들은 부끄러움을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사회의 덕을 가장 많이 보고서도 오로지 자신의 능력의 덕으로만 착각한다. 그들에게 '사회의 힘'을 보여주는 방법은 아마도 '실질적 과세의 형평'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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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147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라 함은 '일상 생활의 모든 현상을 자신만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고, 적용할 수 있으며, 즐길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흔히 '생활의 달인'이라는 사람들의 행태를 가만 보면 일의 댓가를 바라기 전에 '일 자체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시래기를 말리는 일'부터 '우주선을 만드는 일'까지 어느 것 하나 차별없는 진기명기다. 삶을 즐기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어느 하나의 기술도 갖지 못한 개인의 무능과 더불어 실적과 경쟁위주의 조급한 사회환경, 그리고 본질적인 삶 자체의 고뇌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일할 자리'에 대한 문제는 분명 공동체 사회의 책임도 커겠지만, '일의 즐거움'에 관한 문제에서는 구성원 개인의 몫도 만만치 않게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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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20일 토요일

본색146


'무기대등의 원칙'에 비추어 어느 일방의 무기가 절대적으로 대등해질 수 없다면, 결국에 이른바  '무기 각자 개발의 원칙'에 따라 상대방이 선택할 가능성이 농후한 최후의 무기는 과연 무엇이 될까? '지속가능한 삶'이란 현명한(?) 인류의 선택가능한 범위 내의 일이라고 믿고 싶지만, 지구상에 '핵'이 과연 사라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죽기도 어렵고, 굶기도 어렵다'며 쓸쓸히 죽어간 어느 개인의 고백이 우리 사회의 잠재된 '핵'처럼 느껴지는 것은 또한 무슨 까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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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145


'은혜'를 주고 받는 관계는 개인적으로는 혜택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사회적으로는 결코 바람직하다고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시혜적인 조치'라는 것들은 대부분 '은혜'를 받아야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취약한 사람들을 구속하는 또 하나의 족쇄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른바 민주적인 선진사회에서는 구성원들이 공동체의 '동행'이라는 자격만으로도 '인간의 권리'로써 요구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져야 하고, 그런 것들을 폭넓게 충족시켜줄 수 있는 공동체로서의 국가가 이른바 '문화국가'로서 바람직한 모습이리라. 점점 겉만 화려한 솥을 걸어놓고 온갖 잔치를 벌이는 마당에 '국물'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국'을 필요 이상으로 배터지게 먹는 사람들의 그 간격을 무시하고 '지속가능한 성장(?)'이라는 것이 언제까지 가능할 것인가? 이것을 각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것만으로 국가는 또한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인가? 순간의 생존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떨어지는 국물'조차 걷어가는 일은 차라리 '국격(國格)' 이전에 '인격(人格)'의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소외된 아래의 그늘로 부터 햇살을 펌프질해 주기는 커녕, 그마저도 막아버리려는 나라의 '국격(國格)'이란 무엇을 말함인가? '인격(人格)'이 없는 곳에 '국격(國格)'이란 본말이 전도된 것이며, 자연적으로 존중되지 않고 인위적으로 강요되는 '국격(國格)'이란 용어도 시대착오적인 구시대의 유물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된다. 품격있는 공동체로서의 '문화국가'는 '국격(國格)'보다는 오히려 구성원 개개인의 '인격(人格)'을 존중하는데서 출발하는 것이리라. '인격(人格)'이 존중되지 않는 '국격(國格)'의 지나친 강조는 독재의 또다른 이름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진정한 '국격(國格)' 이라면 차라리 '공동체 구성원들의 간섭받지 않는 소통이 자유롭게 보장되고, 그들의 강요받지 않는 민주적인 참여의 모습인 다양한 개별 인격 그 자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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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14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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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완전'한 것은 없다. '완전'하다는 것은 단지 '불완전'한 것들의 '기망'에 불과하다. 따라서 '불완전'한 그대로를 인식하고 받아들일 때, 오히려 인간은 가장 '완전'한 모습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 그러므로 '완전'하다는 것은 어쩌면 '솔직'하다는 것과 일맥상통할지도 모르겠다. 부족하더라도 '솔직'하다면 아마 '불완전'한 그대로 '완전'해질 수 있는 첩경이리라. 그렇다면 진정한 '기도'라는 것들은 그런 공백을 채우는 '고백'들이어야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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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7일 일요일

본색143


"살아간다는 것은 두 마리의 소(牛)가 끄는 달구지를 타고 가는 것과 같다."고 한 적이 있다. 그 중 한마리는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는 습성을 가진 소'이고 다른 한 마리는 '인간의 장점을 북돋우는 습성을 가진 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나름대로 확장해석을 하자면 전자는 포괄하여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 하는 '악(惡)'이고, 후자는 개인보다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선(善)'으로 이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직도 인간은 인간의 제도로써 어느 하나도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지는 못하다. 다만 어느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어느 중간의 지점에서 서로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양상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런 수준에 머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사회적 존재'를 넘어 '문화적 존재'로 자리하기 위해서는 '약점을 이용하는 습성'은 마땅히 버려야 하리라. 그것이 어렵다면 최소한 '약점을 이용하는 습성'을 교묘히 포장하여, 현혹하려고 하는 '사탄(魔)의 놀음'을 해서는 안된다. 당연히 '고삐를 쥔 손'이 어느 소의 고삐를 당기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방향은 결정될 것이다. 언제 어느 고삐를 당길 것인가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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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142


'악법도 법'인 이유는 비록 현재의 악법일지라도 과거의 그 입법과정이 합리적인 최대 다수의 참여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을 경우 그 규범의 효력을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정의(正義)는 목적이 아니라 '과정에의 참여이며, 절차'다. 그러므로 절차의 위법을 관용하는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공정사회'라는 것도 결국 '공정한 참여와 절차'를 전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적법한 과거의 내용들이 현재의 형식을 이루고, 현재의 정당한 형식들이 미래의 정의(正義)로 정의(定意)되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정의(正義)는 '현재 정의(定意)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進行)되는 것'이다. 현재의 기준에서 과거의 악법을 더 이상 법이 아니게 하려면, 현재 이해관계인들의 '정당한 참여와 절차'를 거쳐서 개정하든지 폐지하면 된다. 그러므로 '절차와 참여의 보장'이란 것은 '흐르는 강물'처럼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정당한 참여와 절차'없이 둑을 쌓고, 보를 설치하면서 흐름을 왜곡하는 것은 결코 현재의 정의(正義)가 아니며, 미래의 정의(正義)도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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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141


 '먹고 사는 문제'가 차지하는 개인의 삶의 영역이란 생각보다 훨씬 광범위하다. 한때 진보진영의 정치인이 전향한 궁극의 변을 들어봐도 대개 '밥'을 들먹이는걸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국가가 개인을 위해 작용해야 할 '먹고 사는 문제'의 핵심은 모든 사람들이 '최소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결국 '최소한 인간답게 먹고 사는 문제'는 헌법상 기본권인 '인간답게 생존할 권리'에 연결된다. 하나의 해결책이라면 '최대한'으로  '먹고 사는 문제'에 필요이상으로 집착하는 사람들의 '탐욕을 제어하여 균형을 갖추는 일'일 것이라고 본다. 최근 여당 내에서도 '부자감세철회'논란과 관련하여 말들이 어지럽다. 일의 순서는 먼저 현재의 수준에서 '최소한' 인간답게 생존할 권리를 보장한 다음에 단계적으로 '최대한'으로 '먹고 사는 문제'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돈'의 이름으로 권력 앞에 줄을 세우면서 나약한 '인간'들을 시험하지 말고, 서로가 더이상 악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 아닌가 싶다. 오늘날 파괴해야 할 우상이 있다면, 그 대상은 애매한 다른 종교의 상징들이 아니라 바로 다름아닌 '돈'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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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4일 목요일

본색140


살아간다는 것은 두 마리의 소가 끄는 달구지를 타고 가는 것과 같다. 그 두 마리 소의 마음이 맞아야 달구지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각자의 마음에도 두 마리의 소가 있을 것이며, 이 사회도 예외없이 두 마리의 소가 끌고 있는 중일 것이다. 그런데 그 중 한 마리 소의 마음도 읽지 못하면서 어찌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한탄만 할 수 있겠는가? 그 달구지에 그 소를 달아 맨 사람은 과연 누구이던가? 나아가는 방향과 습성이 아니다 싶으면 서둘러 다른 소를 찾아 나서야(尋牛) 하리라. 그것이 시행착오를 줄이는 길이라는 것을 알 정도의 댓가는 이미 치룬 것 아니던가? 아니더라도 어쩔 수 없이 당분간은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이라도 배워서 익혀야만 한다면, 그렇더라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아마도 '고삐를 쥔 손'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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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30일 토요일

본색139


'뒤집기'로 스트레스받는 것은 고구마뿐만이 아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듯이, 조용하던 사람도 뒤집으면 열받는다. 비록 필요에 따라 '돌려짓기'를 하더라도 제자리로 향하려는 것, 아마도 그것이 자성(自性)일지도 모르겠다. 제자리를 모른다는 것은 분명 고구마보다도 못하다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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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138


현명한 사람들이 침묵하는 이유는 대개 말을 하게 되면 그 즉시 그르치게 됨을 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오류의 위험을 두려워만하여 지나치게 침묵만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무엇이 그르치는 것인지조차 무뎌지기 쉽상이다. 비록 오류임을 알면서도 가끔씩은 그때까지의 결론이나마 소리내야하는 이유는 무뎌진 날(刀)을 세우는 자신의 담금질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갈고 있는 대부분의 날(刀)들은 무엇보다 다름아닌 자신을 향해 있는 것들이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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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137


현실 생활의 주된 관심사는 두가지의 화두, 즉 공동의 상생(相生)이냐 개인의 생존(서바이벌, Survival)이냐의 문제를 떠날 수는 없는 것 같다. 대한민국의 대형 유통업계가 그들만의 생존(?)을 위해 추진을 꺼려하는 기업형 슈퍼마켓인 슈퍼슈퍼마켓(SSM, Super Supermarket)의 규제를 위해 재래시장주변 반경 500m 이내에 기업형 슈퍼마켓 개설을 제한하는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과 주로 재래시장주변 이외의 지역에서는 가맹점 형식의 기업형 슈퍼마켓을 사업조정 대상에 포함시키는 대·중소기업 상생협력촉진법 개정안이 표류하는 사이 대형 유통기업들은 기습 개점 등 박차를 가해 전국에 800개가 넘는 기업형 슈퍼마켓이 서둘러 들어섰다고 한다. 약삭빠른 서바이벌, 그 이후에도 기억해야 할 것은 "생존한 것들이 서바이벌한 그 자리는 분명 생존하지 못한 것들의 무덤 바로 그 위"라는 사실이다.  득의만면할 그 웃음들은 공동묘지 위에서 얼마나 찬란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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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24일 일요일

본색136


어느 날만 날(日)인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이 대부분 직각으로 부러지는 날(日)들이며, 어느 한 사람의 일생에서도 날카로운 역사가 아닌 순간은 별로 없다. 그러나 남겨질 기록들은 거의가 잘 다듬어진 곡선이거나, 이름도 흔적도 없는 그림자 뿐일 것이다. 누가 어둠의 축제 속에 부러진 직선의 반항들을 기억이나 할까마는, 그 모난 각(角)들이 이 시대의 은밀한 탄생들을 만들어 간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의미있는 흐름이란 결코 불꽃처럼 요란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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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22일 금요일

본색135


가장 강한 바람의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자연의 법칙(法則)이다. 그러나 뿌리 뽑히지 않고 건재하여 서 있는 것은 각자의 의지(意志)일 것이다. 땅을 떠나기 위해서는 다시 바람과 별들과 나비에 의지해야 하는 것은 완급을 조정할 수 있는 운명(運命)이다. 그러나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시간과 공간이 흐르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숙명(宿命)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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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134


가능한 한 댓가를 적게 치르기 위해 고민하고 방황하지만, 결국엔 충분한 댓가를 치룬 결과들만 명백하다. 아직도 희미한 것들은 아마도 여전히 댓가를 치르고 있는 중이기 때문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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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133


때로는 너무 가까워서 생긴 일일 수도 있고, 또 때로는 너무 멀리 있어서 벌어진 일일 수도 있다. 조작 가능한 범위 내의 거리에 있지 않는 일들이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인간이 아닌 다른 무엇을 부르는 소리들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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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17일 일요일

본색132


누군가의 눈을 통해서 내가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으며, 누군가 나를 통해서 세상에 닿아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인연(因緣)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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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131


<인형의 집>을 나선 노라와, 그 이후의 행적을 궁금해 하는 이는 있을지 몰라도, 이전과 달라진 집에서 노라를 기다리는 믿음과 다시 집으로 돌아갈 용기와 희망이 노라에게 남아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과연 얼마나 될까? 오늘 아니면 내일, 노라가 돌아갈 집은 과연 어디있는 것인가? 그런 집은 처음부터 존재한 적이 없으며, 아예 지을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경계가 없다면 돌아갈 집이란 애초부터 있을 수 없는 것인가? 모두가 불태워야 할 굴레의 벽들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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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9일 토요일

본색130


그림의 떡(畵中之餠)조차도 내가 그린 그림이라면 그것을 먹지 못함에 누굴 탓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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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129


인생은 파도타기와 같다. 아무리 높은 파고의 위세도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포말로 변하고야 마는 숙명을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는 없다. 해변의 모래 위에서 스러져갈 때에도 땅속이나 하늘로 오르지 못한 운명은 다시 되풀이해서 파도를 타야 한다. 윤회의 업(業)처럼 고해의 바다에서 끊임없이 돌고 또 맴돌아야 한다. 유일하게 벗어나는 방법이란 오직 그러한 존재의 사실을 실상(實相) 그대로 인식하고 바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解脫)뿐일 것이리라. 비워낼수만 있다면 좀 더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더 높은 파도를 즐기며 탈 수도 있을 것이다. 바람따라 흔들리는 매일의 일상이 바로 수행의 시험 그 자체일 것이며, 해탈은 때가 되면 저절로 익어서 고개를 숙이는 기쁜 하심(下心)일 것이다. 오늘은 또 어떤 파도를 타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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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10일 화요일

본색128


눈(眼)이 두 개인 것은 하나가 보지 못하는 것을 다른 하나로 보게 하거나 균형을 잡기 위함일 것이며, 귀(耳)가 두 개인 것도 하나로 듣지 못하는 것을 다른 하나로 듣게 하거나 역시 균형을 잡기 위함일 것이며, 코(鼻)가 두 개인 것도 마찬가지로 하나로 맡지 못하는 것을 다른 하나로 맡게 하거나 또한 균형을 잡기 위함일 것이다. 또한 사람의 팔다리가 각각 두 개인 것도 한쪽이 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한 쪽이 보완하거나 제대로 서 있게 하기 위한 균형을 위함일 것이다. '경제'라는 것이 추구하는 개인적 이익들을 조정하고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보편적 이익을 위한 '복지'라는 것이 뒤따라야 할 것이며, 보수와 진보라는 서로 다른 가치의 소통과 균형을 위해서 또한 '정치'라는 것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리라. 진정한 소통의 전제로는 자신의 감각기관 그대로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몸으로 자신을 바라보려는 인식의 전환이 우선이다. 사람이 한 몸과 한 생각을 바꾸는 것은 한 순간일수도 있고, 평생 불가능할 수도 있다고 한다. 몸과 생각을 바꾸기 전에는 진성(眞性)을 알기는 어려울 것이므로, 그 고통의 과정을 아는 자 만이 비로소 운명(運命)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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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6일 금요일

본색127


한여름밤의 소낙비가 바람을 몰고 간 어느 새벽, 늘 오르던 등산로를 가로질러 큰 거목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혼자 치우기는 버거워 위로 뛰어 넘을까, 밑으로 기어 갈까를 망설이다 옆으로 샐 수 있는 틈을 발견하고서는 교묘하게 돌아서 갔다. 그런데 어느날 그 고목이 흔적도 없이 치워져 있다. 누군가가 뛰어 넘지도 못하고, 기어가지도 못하고, 돌아가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치워준 것이리라. 자신의 입장만을 생각한 나는 악(惡)에 불과한데, 다른 사람을 배려한 그 누군가는 분명 선(善)이다. 비록 자신의 한 몸 밖에 생각지 못하는 악(惡)한 나지만, 알게 모르게 선(善)한 이들의 보이지 않는 그늘 덕에 무사하다. 늘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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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5일 목요일

본색126


사람의 법(法)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은 자연의 법(法)에 따르면 되고, 자연의 법(法)으로도 해결되지 않을 일들은 마음의 법(法)에 따르면 될 것이다. 마음의 법(法)이란 자신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나아가 보다 많은 사람들의 공익을 위해 애쓰는 기준이리라. 마음의 법(法)이라는 것은 마치 흐르는 물과 같은 것이므로 인위적으로 그 물길을 바꾸어서도 안되고, 한 자리에 가두어 두어서도 안된다. 마음의 법(法)을 머물게 하는 것은 그 자체가 폭력이다. 자유로운 흐름을 보장하는 것, 바로 정의(正義)로운 바다로 가는 길의 시작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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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4일 수요일

본색125


선악(善惡)의 기준은 정의(正義)의 기준만큼이나 정의(定意)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정의(定意)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런지도 모르겠다. 기독교에서는 '문으로 들어오지 않는 자는 다 도적'이라고 하고 있으며, 불교에서는 '자신을 위하는 마음을 악'이라고 한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선(善)이란 일단은 '다른 사람을 위하는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나름대로 정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문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라는 말일 것이며, 결국은 자신의 이해를 따지는 분별을 버리고 '오직 베푸는 마음으로 나아갈 뿐'임을 말하는 것이리라. 오늘 나아가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 방향들이 문제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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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3일 화요일

본색124


마음이 머무르면 병이 된다. 머무르지 않기 위해 늘 깨어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한시도 편치 않다. 미친 세상에서는 미치지 않은 사람들이 자주 미친 사람으로 취급을 당하므로, 올바른 정신들은 늘 우울할 확률이 높다. 치료받아야 할 사람들은 어쩌면 이런 세상에서 전혀 우울해하지 않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한 생각을 털고 지우며 오직 나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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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1일 일요일

본색123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주변 환경을 깨끗하게 유지하도록 노력하는 정리정돈이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이다. 정돈되어 있지 않은 몸과 정리되지 않은 마음으로는 주위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판단할 수가 없다. 제자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는 것이 혼돈을 벗어나는 가장 빠른 방법일 것이다. 그런 작은 준비만으로도 길 위에서 길을 찾는 낭비는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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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31일 토요일

본색122


가족에 대한 사랑은 인간의 본성이다. 가장의 생존투쟁도 대개는 가족의 행복을 위함이다. 그러므로 재가자(在家者)의 행동은 충분한 정당성을 갖는다. 출발은 배우자와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부터 시작해서, 부모, 형제자매까지 넓혀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전부를 감당할 수 없다면 불가피한 우선 순위가 있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가족이 없다고 해서 사랑마저 없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 폭을 차별없이 확대해 갈 수 있는 장점을 가진다. 그러므로 출가자(出家者)는 인연을 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연을 넓혀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분별없는 일체로서 사랑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하물며 사랑하는 가족들을 제쳐두고 자연을 자신의 몸처럼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세상을 가장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가만히 있어도 뜨거운 여름, 그들의 무사귀환을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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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30일 금요일

2010년 7월 29일 목요일

연습44

2010. 07. 28. 재보궐선거는 끝났다. 결과는 여당인 한나라당의 압도적 승리다. 야당인 민주당의 입장에서는 이런 참담한 결과를 예측하긴 어려웠을 것이지만, 이미 예정된 조짐들은 일찌감치 있었다. 후보단일화 과정을 두고 보인 민주당의 행태는 정권심판론을 재탕하면서도 스스로는 전혀 성찰하지 않는 오만이 스스로 자초한 결과로 보는 것이 옳은 판단일 것이다.


정부와 여당의 일방적 독주에 제동을 걸기 위해 지난 6・2지방선거에서 민심은 야당의 손을 들어주어 이를 견제하려고 하였지만, 현 민주당의 정체성으로는 민심의 뿌리로 파고 들기엔 분명한 한계를 보여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야당의 바람을 경시하고 안이한 인물공천과 단일화 과정에서의 일방통행적 세력행사로 현 정권과의 차별화에 실패하여 참패를 초래한 것이리라.

비록 정권심판론을 이야기하지만 오히려 정책의 방향은 놓아두고 그 진정성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현 정부의 오로지 한 목적을 위한 소통없는 저돌적인 집행력과 민주당의 행태는 너무나 닮아있질 않은가. 힘의 분배를 무시하고 절차를 존중하지 않는 일방통행에 실망한 민심은 야당에게서도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게 되자, 이번 재보궐 선거에서는 한여름 밤에 꾼 그들만의 꿈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여실히 확인시켜 준 것이다.


상징적인 지역구인 은평을구에서는 비록 현 정권의 실세인 후보가 지방선거에서의 민심의 심판을 의식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체의 중앙당의 지원을 배제하고 홀로 투쟁한 선거과정에서의 ‘진정성’을 참신하게(?) 평가받은 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얼마만큼의 대가와 실망을 유권자가 또 감당해야 할 것인가는 두고 볼 일이겠지만, 차별성없는 명분보다는 현실적으로 실리적인 대표자를 선택하는 것이 당연한 민심인 것이다.

그 밖의 지역에서도 민주당의 뚜렷하지 못하고 힘이 실린 신뢰를 찾아보기 어려운 정권심판론은 6・2지방선거에서와는 달리 강한 바람을 일으키지 못했으며, 그 틈새로 후보중심의 개별 인물들의 지역 실리주의가 판세를 갈랐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혹자는 ‘진정성’에 대한 평가를 지나치게 낮게 두기도 하지만, ‘진정성’조차도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있는 덕목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진정성’의 방향이라는 것이 오로지 자신과 지역, 특정 단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다수 국민, 국가 전체의 공익을 향할 때에 더욱 빛을 발하는 것임을 아는 일일 것이다. 가치의 방향설정이 뚜렷하지 못할 때 현실 정치의 세계에서는 ‘진정성’이라는 맹목적 가치만으로도 그것이 구체적 실리와 결합할 때에는 엄청난 파괴력을 갖는 변수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의 바위를 뚫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물방울들이 쉼없이 추락해야 하는지, 그리고 또 얼마나 긴 새벽을 뜬 눈으로 지키면서 기다려야 할 것인지 되돌아 보게 한다. 모든 결과는 그 자체로써 원인을 갖는 것이므로 무법(無法)이 아닌 한, 각자의 뜻과 다를지라도 운명처럼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 또한 민주주의일 것이다.

민심은 그렇게 쉬지 않고 흐르는 것이므로 누가 과연 최후의 동행이 될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오직 방심(放心)없이 민심(民心)의 주류(主流)를 살펴 함께 흐를 뿐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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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23일 금요일

본색120


개인의 의사결정은 자유로울수록 정의의 기준에 부합할 것이지만, 제도상의 정책결정은 자유롭지 못할수록 오히려 정의의 기준에 부합한다. 간접민주주의라는 것은 시민의 뜻으로 위임을 하되 위정자의 의사를 적절히 견제하여 균형을 추구하도록 만들어진 제도일 것이다. 따라서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민주적인 제도가 아니다. 최근 공적기관에서 민간인 사찰을 자행한다든지, 권력기관 내부의 암투 등의 원인으로 정적을 사찰하는 행위는  민주주의와는 한참을 멀리하는 '야만의 정치'이다. 아무리 제도를 철저히 갖춘다한들 완벽한 제도는 없을 것이므로 결국 궁극적으로는 '도덕성의 문제'로 귀결될 것이다. 최근 한 여당 의원의 성희롱발언 등을 통해 다시 부각되고는 있지만 새삼스러울 것은 없는 대다수 정치인의 인식이란 여지없이  '정글의 법칙'에서 오직 살아남기 위해 살아남은 자들의 오만이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인 것은 뿌린대로 거두고,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사실을 맑은 하늘처럼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인간의 조건'이다. 한번의 실수는 용납하더라도, 두번의 실수는 엄격히 제도하려는 사회, 바로 '문화국가'의 조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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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20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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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오르는 등산길에서 가끔씩 우연히 만나는 70대 가량의 노인 한 분이 계신다. 그 분은 만나는 사람마다 그냥 단문의 '안녕하세요'도 아닌, '늘 행복한 하루 되세요'라며 상대에 상관없이 높임말로써 먼저 정중히 인사를 한다. 나는 늘 '아..네..감사합니다.'라는 정도의 뒷북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변화를 몰고 오게 하는 궁극의 힘은 아마도 그 노인처럼 사소하지만 마음을 담은 진정한 전달에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 본다. 혁명이란 것도 거창하게 붉은 깃발아래 폭풍처럼 달려오는 것이 아니라, 그 노인처럼 조용하지만 강력한 메세지로써 꾸준히 다가오는 것이리라. 그 노인을 본받아 만나는 사람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보려 하지만, 10중 8, 9는 여전히 혀끝에서 맴돌고 만다. 아직도 세상을 농익은 채로 바라보는 관조의 힘, 관용이 부족한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도 스스로 벽을 깨지 못하는 불신과 경계의 한계때문일까. 아무리 사소한 언행이더라도 그것의 위대한 힘을 믿고 따르려는 노력으로부터 본질의 혁명은 시작되는 것 같다. 위대한 혁명가는 아마도 먼저 마음을 여는 사람일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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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18일 일요일

본색118


평가의 대상인 존재에 대한 확정없이 그 존재를 평가한다는 것은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교과서에 기술된 역사적 사실들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 뒤의 황당함이란 뒤바뀐 혈육을 알아채지 못하고 자신의 피붙이로 키워 온 부모의 심정에 비견할 수 있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 같다. 낳은 정과 마찬가지로 기른 정이란 상당한 가치를 가진 새로운 관계로서 존재를 설정하긴 하지만, 허구의 역사적 사실은 오류가 확인되는 즉시 존재로서의 가치를 남김없이 상실한다. 평가할 수 없는 것들을 평가한 코메디인 것이다. 아직도 여전한 허구들이 역사란 이름으로 무장한 채 허울 좋게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도 진실규명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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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15일 목요일

본색117


'가족인' 사람과 '가족이 아닌' 사람의 차이는 고난의 순간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행복을 공유하는 것은 비록 남이라도 쉽다. 그러나 고통을 나누는 것은 피붙이라도 쉽지 않다. '가족' 특히 '부부'의 관계가 위대한 것은 법적인 동거, 부양, 협조의 의무를 넘어서 실질적인 운명공동체로서 존재할 때일 것이다. 부족함을 감싸안는 대신 서로에게 바라는 것만 요구하다보면 비록 가진 것이 얼마 없더라도 그나마도 모두 잃고 마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기 쉽다. 한참을 부족해도 이미 내가 가진 것들, 그 소중함들이 가족의 존재만으로도 든든할 때가 있다. 현재 '가족의 굴레' 속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오히려 '가족'이 없는 것이 살아가기에 더 쉬운 일일 지도 모른다고 잘못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완전한 착각이라고 생각한다. 친구가 있어 절실히 친해지면 또한 '가족'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 하나의 가족'을 운운하며 간혹 상업적 기망을 하기도 한다. 모두가 '가족의 힘'을 배경으로 한다. '가족주의'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바탕의 '인간애(人間愛)'를 다시 보고자 함이다. 위대한 사람은 현재 돌보는 가족이 가장 많은 사람이며, 위대한 지도자는 상관없는 남도 가족으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가장 위대한 이름은 바로 당신, 다름아닌 우리들의 '아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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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14일 수요일

본색116


한치 앞도 가늠하기 힘든 현실의 삶 속에서 기도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비록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학자는 연구업적으로써, 예술가는 작품활동으로써, 시인은 시작(詩作)으로써, 노동자는 현장의 노동으로써, 자본가는 끝없는 이익의 추구로써 각자 자신만의 방식의 기도를 한다. 어떤 영역에서든 성과를 내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 기도의 간절함에 있을 것이다.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열심히 목숨을 거는 것이다. 그러나 OECD국가 중에서 자살률 1위라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 댓가로써 일부의 사람들이 누리는 기적같은(?) 한강의 삶으로 충분한 것인가. 배수진을 치고 있는 우리의 기도는 삶과 죽음이라는 공간의 틈 속에서 한가로이 머무를 수 없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절망의 준비다. 그래서 일부 사이비 종교와 종교인들이 그 틈새를 노려 혼란한 판세를 키우고 있는 것이다. 비록 1등이 아니더라도 절망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법, 최소한 자살률 1위의 오명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과연 없는 것일까. 누구나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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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13일 화요일

본색115


'다움'이란 존재에 대한 최상의 평가를 이르는 말일 것이다. 사람은 사람답고, 짐승은 짐승답고, 정치인은 정치인답고, 시민은 시민답고, 종교인은 종교인답고, 신자는 신자답고, 교육자는 교육자답고, 학생은 학생답고, 부모는 부모답고, 자녀는 자녀답고, 어른은 어른답고, 아이는 아이답고, 고양이는 고양이답고, 쥐는 쥐답고, 하늘은 하늘답고, 바람은 바람답고, 강물은 강물다울 때, 세상은 세상답게 흐르는 것이리라. '아름답다'라는 말도 존재에 대한 조화의 균형이 최적의 상태를 이루는 것을 지칭하는 말인 듯 싶다. 마찬가지로 나도 나다울 때 비로소 최상의 나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런데 그 '다움'을 위해서 각자는 과연 어디쯤 서 있어야 하는 것인지 때로는 가늠하기가 쉽질 않다. 고양이가 더 이상 쥐잡기를 포기할 때 더이상 고양이답지 않음과 같은 혼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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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9일 금요일

본색114


보이는 것들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 잎 속에 가려진 호박이 숨어서도 어김없이 제 길을 가듯이 이유있게 느린 자연은 늘 대책없이 시끄러운 인간들보다 위대했다. 종교적 가치관을 떠나서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한들 자연을 건드릴 때마다 하늘에 제를 지내는 자연스런 마음들을 결코 가벼이 생각해서는 안된다. 무모한 도전을 치장하기에는 무고한 희생들이 너무 크다. 강변에서 한 순간 삶의 터를 잃은 생명들, 그 자연이 어느 방죽을 허물어 다시 사람의 생명을 위협할지 알 수 없다. 세상에 이유없는 일들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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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23일 수요일

본색113


삶이란 그 자체로서 '싸움'이다. 과거와 현재의 갈등이든, 현재와 미래의 대립이든, 자연과 인간의 부조화든, 인간과 인간의 항쟁이든, 문명과 문명의 충돌이든, 집단적 계급투쟁이든, 개인적 아(我)와 비아(非我)와의 투쟁이든, 분명한 것은 예외없이 '싸움'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싸움의 '승패'라는 것은 한정된 조건하에서 제한적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들이라고 생각된다. 어느 시기라든가, 어떤 성과를 전제하고서야 비로소 성립가능한 것이리라. 결국 소멸하지 않는 것은 없으므로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는 것이 본질이겠지만, 그러한 진실을 사람들은 현실의 삶을 핑계로 쉽게 외면하든지, 무시하곤 한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현상들에 급급해하며 승리에 쉽게 취하든가, 패배에 크게 좌절한다. 그러나 운명적으로 피할 수 없는 투쟁일지라도 마냥 짧은 승리에 취하기 위해 부질없는 싸움들을 예비하는 낭비들과 무모한 희생들은 없는지 모르겠다. 무조건 이기기 위한 싸움이기 보다는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가치들이 어처구니 없이 공격당하는 만행만은 제어하는 것이 양심인(良心人)과 문화국가(文化國家)에 어울리는 최소한의 격(格)이 아닐까 싶다. 그 최소한마저도 때로는 버거움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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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17일 목요일

본색112


자유의지로써 누구로부터, 무엇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는 그 누군가에게, 그 무엇에게로 다가가는 것이므로 서운한 일만은 아니다. 오히려 분노해야 하는 것은 오직 자신과 다른 생각과 행동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유의지를 박탈 당하거나 억압 당하고 왜곡 당하는 일일 것이다. 다양한 사상과 생활양식의 존재, 그리고 제한받지 않는 선택가능성과 소통의 유지, 그것이 사상의 자유시장에서의 경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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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16일 수요일

본색111


공정한 심판하에서 오직 실력과 노력의 차이로만 명백하게 승패가 결정되어야 할 스포츠의 역사도 살펴보면 어김없이 '희극 속의 비극적 암투'로서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대변하고 있다. 독점자본의 횡포와 과점계급의 전횡은 예나 지금이나 월드컵과 올림픽이 단순한 축제, 그 이상의 폭압적 의미를 함께 내포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중독된 환자처럼 무뎌진채 '붉은 악마'들의 함성에 파묻혀 있어도 자신의 국적은 비록 '조선'이 아닌 '한국'이지만 남한도, 북한도, 일본도 아닌 재일교포3세라는 디아스포라, 한 선수의 복잡한 눈물이 어김없이 그늘진 축제 속의 현주소를 다시금 깨닫게 한다. 다시 하나될 날은 그 언제쯤 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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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15일 화요일

본색110


돌고 돌고 또 돌아서 제 자리로 돌아온 것들의 역사는 간단치 않다. 예정된 날보다 3년이나 늦게 귀환하면서 하야부사(송골매라는 뜻의 일본의 우주탐사선)가 떨어뜨린 캡슐 속에는 아마도 지구와 화성 사이의 어느 소행성(이토카와)의 생성과 성장의 비밀이라는 선물을 담고 있을 것이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비록 모든 장비는 거의 파손되고 에너지는 소진되었지만,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귀환을 소망한 의지의 기도 덕분일 것이리라. 아직 출발도 제대로 하지 못한 우리의 나로호, 무엇보다 가야할 길은 더 멀겠지만, 그보다 먼저 비록 만신창이로 길을 잃고 미아로 허공을 방황하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제자리로 불러들일 그런 인내와 관용의 준비가 되어있는지 그것부터 점검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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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109


물은 길을 내어주는 땅의 속으로 녹아들면서 바다로 간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물길 하나 내어주지 못하는 아량으로 바다는 어림도 없다. 상류의 조급함과 하류의 느슨함이 모두 바다로 가는 하나의 물길이다. 빠름과 느림이란 것도 같은 흐름 속에서는 본질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일종의 착시현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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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13일 일요일

본색108


시장으로 넘어간 것은 권력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마저 이미 팔아 넘긴 듯 하다. 교묘한 '상술'이 사람사는 세상의 원칙과 상식마저 '기획상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가치와 신념을 위해 운명처럼 목숨을 건 사람에 대한 '추모의 정'마저, 굶주린 하이에나를 닮은 '장사'꾼들에게는 단순히 입도선매, 창고방출의 대상에 불과한 듯. 내일은 또 어떤 급한 입들이 죽은 영혼을 팔기 위해 헤드라인부터 '장사'진을 치고 있을지. 싸움의 대상은 순서를 잃고 혼돈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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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10일 목요일

본색107


애플이 아이폰과 아이패드에서 구글의 애드몹(AdMob)과 다른 광고 솔루션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새로운 개발자 조건'(new developer terms)를 내검으로써 확실한 '제국의 통제'에 나섰다고 한다. 구글의 광고 사업조직인 애드몹의 설립자, 오마르 하무이(Omar Hamoui)는 '개방과 경쟁'을 내세우면서 개발자와 소비자의 피해를 우려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모르겠지만, 현재로선 확실한 '디지털제국주의'시대가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인 듯 하다. 혁신과 공유라는 이름의 또 다른 독재의 기술을 은폐하기 위한 교묘한 자유(?)의 자화상들이다. 피를 흘리지 않고도 세상을 지배할 수 있게 된 지금, 사람들의 자유는 어디를 흐르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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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9일 수요일

본색106


통제가 혁신을 낳는다고 보이는 것은 통제 밖의 자유에 대한 독점적 지배라는 유인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통제를 통하여 혁신이란 이름으로 독점이익의 유혹에 쉽게 빠지면서 그것을 향유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이 합리적인 수준의 이익을 넘는 악의 씨앗이 되지 않도록 감시하는 일은 통제 밖의 자유세력들의 몫이다. 개인적 자유의지들의 최종적인 방호벽은 그들을 선택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다. 단, 전제는 그들을 선택의 대상에서 제외하더라도 나머지 삶의 영역에서 큰 지장이 없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애초부터 무게중심이 지나치게 한쪽으로 쏠리는 것을 사전에 미리 경계할 필요가 있다. 모든 생활영역에서 견제와 균형을 위한 대안세력의 존재가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넓혀주고, 그 선택의 폭도 확대해 나갈 때, 각 선택의 객체들은 혁신, 또는 다른 어떤 이름으로 선택되기 위한 경쟁들을 한다. 통제는 혁신을 위한 빠르고 손쉬운, 그러나 위험한 한 방법일 뿐, 그것을 결코 최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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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색105


'진보의 성공'은 어느 순간으로 가능할지는 몰라도, 그것이 지속가능한 가치로서 자리하기는 어렵다. '진보의 가치'란 일정하게 정해진 규격화된 몫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늘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어떤 정의(正義 혹은 定意)를 요구하는 것'이다. 달라진 상황에 따른 예고된 분열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진보라고들 자신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혹시 진보도 보수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때로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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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6일 일요일

본색104



길의 시작과 끝은 알 수 없지만, 삶의 시작과 끝은 아마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부터 감당할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까지'일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종말에서의 인식은 적어도 둘 중 하나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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