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언어와 도구의 사용으로 '만물의 영장[靈長]'이 된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는 인간이 만들어낸 생활속의 도구들을 통해서도 알아차릴 수 있는 면이 있다. 간단한 일례로 자동차의 구조를 보더라도 자동차는 편리한 이동수단에 대한 인간 욕망의 산물이지만, 그 내면에는 속도를 내는 액셀과 속도를 줄이는 브레이크를 동시에 장착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탐욕으로 질주하더라도 일정한 욕망의 수준을 넘어서게 되면 그 탐욕을 제어하고자 하는 기제가 인간의 본성에 처음부터 내재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것이 선이든 악이든 상관없이 태생적으로 '이기적인 동시에 이타적인 심성의 존재'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기적이고, 이타적이란 용어도 '존재의 실상'과는 다른 '인식의 관점'에 불과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본성이란 '자유'를 주장하면서도 '책임'을 의식하게 하고, '자율'을 강조하면서도 '연대'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하며, '경제학'과 더불어 '윤리학'을 가르키는 '이중적 심성'이라고나 할까. 따라서 어느 하나가 주(主)가 될 수는 있겠지만, 어느 한가지 특성만으로는 결코 '만물의 영장'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제도라는 것들도 '무한질주와 잠깐멈춤 사이의 어느 정거장에서의 정돈 중인 일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의 '교통체계'라는 제도들이 현재의 기술로 가장 합리적인(?) 소통을 위해 준비되고 있는 것 또한 마찬가지의 예일 것이다. 운전자의 성향과 기술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들도 많을 것이므로 누가 운전대를 잡는가 또는 누구에게 운전을 맡기는가에 따라 '운행자로서의 책임'과 '피해자로서의 구제'의 폭도 달라질 것이다. 좀 더 기술이 발달하여 자동차가 스스로 알아서 운행을 할 수 있다면, 그래서 잘못된 길을 들어섰을 때 마치 아무일 없는 듯 백지상태로 포맷도 하여 다시 출발할 수 있다면 지금과는 또 다른 역할의 '진화(?)된 심성'의 세상일 것이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결국 '지금 현재'라는 같은 차를 타고 있으며, 차는 스스로가 낸 길을 따라 가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얼마나 자주 '일단은 저지르면서도 되돌아 볼 줄 아는 작용과 반작용의 심리적 기제'로 지속가능한 공존을 위해 노력하는가에 따라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의 여부도 달려있다고 본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 역시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쓸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