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5일 일요일

연습46

흔히 '실천하는 지성'의 대표로 불려 온 진보적 언론인이자 언론학자이며, 사회운동가였던 리영희(李泳禧) 전 한양대 교수가 2010년 12월 5일 새벽 0시 40분쯤 향년 81세로 별세했다. 1929년 평북 삭주에서 태어나 한국해양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57년부터 합동통신에서 기자로 일했고, 1964년 유엔의 남북한 동시 초청을 기사화하여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으며, 1969년 베트남 전쟁 파병 비판기사를 썼다가 조선일보에서 쫓겨났고, 1971년 ‘군부독재ㆍ학원탄압 반대 64인 지식인 선언’ 참여로 합동통신에서 해직됐다.


1980년 신군부가 ‘광주소요 배후 조종자’ 중 한 명으로 그를 지목, 투옥했을 때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리 전 교수를 ‘메트르 드 팡세’(사상의 은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1987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에서 교환교수로 한국사를 강의하였으며, 이후 한겨레신문의 이사 및 논설위원으로 일했다. 1989년에는 한겨레신문의 방북취재를 기획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다시 구속되기도 했다. 그의 인생은 성찰하는 지식인으로서 반지성에 맞선 치열한 싸움의 거침없는 역정으로 충분히 불릴만하다.


그는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관념’이 아닌 ‘사실’, ‘이론’이 아닌 ‘실천’을 강조했다. 그는 글쓰기를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라고 정의하면서,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 듯’, 진실과 균형의 날개로 저항하면서 성찰하고자 했다. 리 교수는 <전환시대의 논리>(창비사, 1974), 《우상과 이성》(한길사, 1977)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두레, 1994) 등 다수 저서를 남겼고, 지난 2005년 자서전 <<대화>>(한길사, 2005)를 끝으로 지병으로 인하여 모든 집필 활동과 사회적 발언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그의 사상에 대해서는 우파적 입장에서 ‘비체계적인 인본적 사회주의자’로 평하기도 하고, 사민주의적 사회운동가 또는 좌우(左右)를 뛰어넘는 ‘진보지식인의 대부’로 평하기도 한다. 현대사회가 전적으로 결여한 채 출발하였던, ‘비판적 계몽의 선도자’, 또는 상황이 달라지면 지식인은 지난 날보다 더욱 지혜로와져서 이분법적 사고와 비타협적, 독선, 과격을 벗어나는 자기 수정을 해야 함을 강조하는 2005년의 발언 등으로 ‘성찰의 대부’로 칭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자신의 ‘책이 한 권도 팔리지 않아 인세가 0원이 되는 게 소원’이라던 그의 바람을 뒤로 하고, 오늘 ‘가치있는 새 한마리’가 추락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분명 ‘우상의 시대’에 ‘이성의 첨병’이었다. 그러나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기도 하지만, ‘몸부림’이 없다면 앞(?)으로의 진행이 어려울 것이고, ‘분열’은 ‘환멸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성장의 필수과정’이다. 분열의 현재는 고통이지만, 분열한 이후는 ‘한걸음 더 성숙’이다. 그러므로 성숙하기 위해 분열하고, 분열하기 위해 외로운 고통을 선택하는 길, 그것이 ‘합리적인 보수’와 ‘성찰하는 진보’의 진면목이 아니겠는가 싶다. 따라서 지금 눈앞의 현실만을 근거로 당장 성공과 실패를 논하는 것은 오류요, 성급한 결론일 따름이다. 강물은 결코 멈추지 않고 흐른다.


우리는 너무 자주 분열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또한 경쟁력일지도 모른다. 흐르는 강물을 인위적으로 가두지 않고 지속적으로 흐르게 하는 것, 그것이 반도적 기질의 태생적 영향일지도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다. 병리적 도그마에 대한 반기는 그러한 영향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싶다. ‘가두리양식’은 ‘교활한 양육’에 불과하므로 경계해야 할 것은 분열 그 자체라기 보다는 가려진 기만적 술수들일 것이다.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자연과 인간의 본성’을 ‘자유’와 ‘공정’의 이름으로 왜곡하거나 기만해서는 안된다. 민주적인 절차 속에 제도적 참여를 확대해 나가는 것, 그것이 아마도 남아있는 미래일 것이다.

Posted via email from 길 위의 연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