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12일 일요일

연습47


2010 12 10 오후 4시 서울 중구 명동 서울 YWCA 강당에서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서울대공익인권법센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이 고() 조영래 변호사 20주기 추모행사를 열었다고 전한다. ‘전태일평전’의 저자이기도 한 조영래 변호사는 1980년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다 1990 43세의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1947년 대구에서 태어난 조 변호사는 경기고등학교 3학년 때 한일회담반대 시위를 주도하다 정학 처분을 당했고, 서울대 법대에 수석으로 진학한 후에도 삼성재벌밀수규탄, 68부정선거규탄, 3선개헌반대 등 학생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재학 중인 1971 1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지만, 여러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수배와 투옥을 겪은 뒤, '서울의 봄'이라 불리던 1980년 수배가 해제돼 사법연수원에 재입학함으로써 뒤늦은 1982년에야 변호사가 됐다.

 

1971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에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돼 1 6개월간 복역하였으며, 민청학련사건으로 수배돼 유신정권 내내 약 6년 동안 숨어 지내며 도피생활을 하기도 했다. 오늘날까지 살아있는 전태일 정신으로 각인된 <전태일평전 :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은 그가 도피생활 중에 집필한 것이었지만 사후에야 그의 저작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변호사로서 1984년 망원동수재 집단소송, 1986년 여성조기정년제 철폐, 1987년 상봉동 진폐증 사건, '보도지침' 사건 등 끊임없이 인권변호사 활동을 실천해 옴으로써 글자 그대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불꽃처럼 살다 가신 분이다. 1986년 부천서성고문사건으로 독재권력의 야만성을 폭로했고, 수해를 본 서울 망원동 주민 2400가구를 대리해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받아냄으로써 인권과 환경문제 등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치열했던 사람”(장기표 신문명연구원장)이었으며, “집단소송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망원동 수재사건(1984), 여성차별을 시정하는 계기가 된 여성 조기정년제 철폐(1986), 주민에 의한 공해병 소송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상봉동 진폐증 사건(1987) 등 우리 사회 민주화의 핵심고리가 된 사건들을 모두 승소로 이끈”(김선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정의의 사도’로서 1988년 민변의 창립도 그가 주도했다고 전한다.

 

존경할 만한 사람이 없는 오늘의 시대적 좌표로서 명분을 내던지고 몸으로 진실 그대로를 전하면서 인간에 대한 한없는 애정과 겸손에서 비롯된 그의 행적은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하고도 실재적인 방향성을 제시하면서 확증하고 있다. 홍성우 변호사의 추도사에는 “조영래가 가는 곳에는 진실이 있었고, 정의가 있었고, 승리가 있었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그가 살았던 그 ‘야만의 시대’에 그는 분명 가장 정의로운 인간의 삶으로써 우리에게 사람사는 세상, ‘인간의 시대의 의미를 남겨주었던 또 한 분이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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